장기기증희망 신청을 했다.
2025년 새해를 맞으며 했던 결심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에야 비로소 실행했다.
기증희망 등록은 장래에 뇌사나 심정지에 이르렀을 때 본인의 장기나 신체조직을 대가 없이 기증하겠다는 의사표시다. 신청 후 언제든 의사를 철회할 수 있으며, 법적 효력이 없다는 점에서 내게는 부담이 적게 느껴졌다. 실제로 기증희망 신청자이더라도, 사망 시 유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기증이 가능하다.
내게 부담이 됐던 것은 장기를 몸에서 들어내는 무서운 상상이 아니라, 엄마의 반응이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딸이 어느 날 뜬금없이, 죽으면 장기기증을 할 거라고 말하면 당신의 마음은 상처받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구들은 모두 “뭐?! 뭐래 진짜?!”하며 놀랐기 때문에 엄마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더 주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하고 10개월이 흐른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수용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혼인 전 동거나 국제결혼, 문신 등 터부시되는 일들에 대해 엄마는 놀랍도록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 전에는 동거를 해볼 것을 권했고, 국제결혼은 대환영이었다.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에 처음 자취를 시작하게 된 것도 엄마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자취를 하고 싶어 할 때, 나는 ‘내가 왜 집 놔두고 나가 살아야 해?’라며 반기를 들었고, 엄마는 그런 내게 철딱서니 없이 굴지 말라고 했었다.
하여튼, 잊을만하면 변화구를 던져대는 엄마와 외출했을 때의 일이다.
엄마는 병원에서 과잉진료를 받았다는 지인에 대해 얘기하다 만일의 상황이 닥치면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온갖 장치와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산소호흡기를 한 채로 살고 싶지는 않다면서.
언젠가 같은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지라 나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이때다 싶어 기증희망을 입 밖에 꺼냈다.
엄마는 담담했다. 내가 뭘 걱정했었나 싶게 허무할 정도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애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의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아픈 일이었지만,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 뒤에 남겨질 것들이 나를 더 두렵게 했기에, 때론 죽음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기증신청을 생각했을 때도 나는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잃어버릴 것은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육체와 내 뒤에 흩어질 열망들이지만, 나의 일부가 누군가의 꿈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 이건,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결정이다.
나의 삶은 결국 내 죽음이 증명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멋진 사람으로 폼 나게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