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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Sep 25. 2024

내가 품은 마음은 결국 돌고 돌아

동그란 사과의 기적

콘도 야외 풀에서 만난 할머니는 꼭 우리나라 마음씨 좋은 할머니 같다. 항상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Bonjour!"인사를 하고, 아이들을 보면 눈이 반달처럼 반짝이며 이쁘다 해주셨다.


우리가 사는 오래된 콘도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분들이 많고, 그분들은 정말 정확하게 눈에 띄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아이를 키운 분과 그렇지 않은 분, 몸과 마음의 건강상 여유가 있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으로.


파트너는 있지만 아이 없이 싱글로 오랜 시간 지내신 어르신들은 대부분 아주 coquette (프랑스어 단어로 예쁘게 치장한 이란 뜻) 하게 꾸미고 강아지와 함께 다닌다. 경박하지 않고 품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도록 예쁜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어쩜 나이가 들어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지? 매번 놀라곤 한다.

반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해심이 좁고 날카로운 할머니들도 존재하는데 그 극명하게 갈리는 두 가지의 반응을 이번 여름, 콘도 내 풀장에서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야외 수영장인 콘도 풀은 6월에 문을 열어 8월 초까지 두 달간 운영을 하였다. 수영장인 만큼 아이들이 많았고 물과 아이들이 합쳐지면 피할 수 없는 아이들의 신난 음성들이 엉켜 뜨거운 여름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수영장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수영장에 상주하는 라이프가드조차 민망해하며, 어쩔 수 없으니 협조해 달라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수영장의 퀘백 쿠아 이곳 할머니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어떻게 야외 수영장에서 아이들 보고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수영만 하라고 하는가?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기적이다. 우리는 이만치 늙어 아이들이 장성하여 다 나갔지만, 요만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울 때를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며 목소리를 대신 내 주셨다.


줄기차게 민원을 낸 가정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셨다. 강아지와 산책을 매일 같은 시간에 하여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는데, 막 상 그분이 민원의 주인공이라니 의외였다.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두면 야외 수영장에서 들리는 소음이 유독 불편했나 보다. 주중에는 수영장에 아이들이 보통 캠프에 가서 없고 주말 낮 시간에 아이들이 몰리는데, 주말 낮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도 거슬리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안타까웠다.


예전에는 아이를 키우는 부류가 워낙에 대다수라 아이들의 소리에 대해 더욱 관대하였다면,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진 요즘, 아이를 키우는 가정보다 그렇지 않은 가정이 더 많은 곳에서는 아이와 관련한 모든 사항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노키즈존, 신도시에서의 놀이터 소음에 관한 민원 등의 기사를 접할 때, 단 한 번도 노년의 세대에서 일어날 민원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신혼부부 등의 젊은 세대에서의 민원이었으므로.


이곳, 몬트리올은 조금 더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과 가족형태가 오래전부터 존재하다 보니 많은 노년층에 아이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싱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시고, 이런 민원들이 잦은 편이라고 한다.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어쩌면 우리나라가 들이닥칠 저출산율 시대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다. 모든 세대가 어우러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곳이 과연 미래에 존재할까? 고민해 보게 되는 여름날들이었다.


뜨거운 여름이 흘러가고 9월의 햇살에 반짝이며 붉게 익은 사과를 직접 따 왔다. 한 바구니 가득 담은 사과를 주변의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열심히 예쁜 아이들을 골라 소분하였다. 동글동글한 사과를 열심히 닦아 반짝이게 한 후 단정히 줄을 세워 포장하였다. 메모지에 "아이들이 직접 딴 사과예요. 함께 나누고 싶어요."라고 쓰고 다섯 집에 나누어주었다.


저녁 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싶어 문을 열어보니, 여름날 풀장에서 매번 방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시던 할머니께서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손에 머핀을 가득 담은 접시를 내민다.

너무 예쁜 사과를 받아서 하루 종일 머핀이 굽고 싶었다고 하시며, 맛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에 오목하게 들어가는 머핀은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작게 사과를 잘라 토핑으로 두른 윗부분이 향긋함을 더해주었다.

할머니가 두른 빨간 앞치마에는 예쁜 자수가 그려져 있었고, 그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행복하게 오븐을 여셨을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머핀을 한 입 베어먹으니 빨간 사과의 변신은 향긋한 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부드럽고 촉촉한 머핀이 되어 입안에 사르르 녹는다. 아이들은 연신 "여태껏 먹어본 머핀 중에 가장 맛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은 돌고 돌아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형식으로 따스함을 돌려받기도 한다. 외국 살이는 겉보기처럼 화려하지만은 않다. 이방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며 좁디좁은 한인사회 안에서 주홍 글씨가 박히지 않으면 본전인지도 모를 삶,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삶이기도 하다. 그저 '겸손하고 진실되게 지내다 보면 사람들도 상황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선명해지겠지' 생각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장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신념대로 나 자신의 삶에 떳떳하게, 아이를 키우고 내 삶을 살면 된 거라 도닥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내재적으로 교묘히 장치되어 드러나지 않는 인종 차별부터 대놓고 보이는 동족인들끼리의 배반까지, 외국인에게서도 한국인에게서도 받는 아픔들은 테니스코트 안의 공처럼 이리저리 튀겨나가지만 공은 터지지 않고 그저 코트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단단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뿐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오늘과 같은 날도 찾아온다. 반짝이는 동그란 사과와 향긋하고 촉촉한 머핀이 되는 기적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품은 마음이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따끈하고 향긋한 애플 머핀을 베어먹으며, 이런 순간들을 더욱 마음에 담아 품고 살아야지 다짐해 본다.

동그란 사과가
향긋한 머핀이 되어 돌아오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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