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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도 Dec 08. 2021

로보캅 (1987)

가벼운 오락영화라기엔, 너무도 무겁고 차가운.


폴 버호벤 (Paul Verhoeven) 감독이 오랜만에 신작 <베네데타>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로 조금은 더 빨리 만나본 이 영화에서, 폴 버호벤만의 원초적인 화술은 수백 명의 관객들 눈앞에 펼쳐지는 야외상영의 광기와 어우러져, 올해 영화제 중 가장 잊지 못할 한 장면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올해 나이로 83세가 된 1938년생 폴 버호벤 감독은 사실 저에게 <토탈 리콜>(1990), <스타쉽 트루퍼스>(1997), <할로우맨>(2000)과 같이 청불 딱지가 붙은 추억의 SF영화들로 더욱 친숙한 감독입니다. 그리고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 하는 작품 <로보캅>(1987)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SF장르부터 <원초적본능>(1992)까지, 한편 한편 너무도 익숙한 작품들을 들어다보면, 이 모든게 한명의 감독이 만든게 맞나 싶을 것이다.







유럽인이 묘사한 미국의 폭력성

<블레이드러너>(1982) 내 사이보그 인간을 뒤쫓는 경찰에서 영감을 받아, 거꾸로 사이보그가 된 경찰의 이야기는 어떨까란 역발상으로 탄생한 스크립이 처음 폴 버호벤의 손에 전해졌을 때, 이 네덜란드인 감독은 로보캅이라는 유치한 제목만 보고, 하마터면 각본을 읽지도 않은 채 그대로 폐기할 뻔했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스크립을 보고 이야기 이면의 풍자성을 읽어낸 아내의 통찰력 덕분에, 결국 감독직을 맡기로 한 것은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이지요. 영화에서는 극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잔인한 장면 대부분이 삭제되어 전체 관람으로 상영을 한 덕분에, 로보캅의 추억이 유년기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어렸을 때 보아도 국내판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게 많았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러나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 고어적인 폭력성이야말로 ‘사회 풍자성’을 돋보이게 하여, 영화 ‘로보캅’만의 정체성을 이끌어 갑니다.

SF 영화의 역사적 명작 <블레이드러너>가 낳은 또다른 역작



사실 폴 버호벤은 일단 영화의 주제가 선명해지면, 그것을 표현코자 어떤 수위의 성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동원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감독입니다. 유럽인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미국의 폭력성이라는 지점이 지금 봐도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화려한 ‘자본주의’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그 이면의 ‘추악한 비인간성’을 디테일하게 풀어내어, 둘의 커다란 괴리감만큼이나 직선적인 풍자를 미국이란 사회에 날리는 것이죠. 덕분에 폴 버호벤의 연출력은 할리우드란 시스템에서 좀처럼 시도하기 쉽지 않은 풍자성을 상업적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설계는 최근 그의 최신작 <베네데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베네데타는 예수가 등장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데, 이 꿈들은 항상 잔인하거나 어딘가 모르게 성적이기까지 하죠. 당연히 폴 감독이 의도적으로 넣은 이러한 자극적인 씬들은 교회의 ‘성스러움’과는 노골적으로 대비되어, 누군가에게는 다소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한 이질감을 자아내고, 그 결과 당시의 남성주의적, 기독교 중심지배 사회상을 풍자하는 희극적 연출을 띕니다.

폴 버호벤은 가능한 가장 과장되게! 가장 잔인하게! 묘사할 것을 끊임없이 주문했다. (우) 좀 더 실감나는 머피의 살해장면을 위해 제작된 그의 상반신 밀랍인형.



<베네데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덧붙이자면, 폴 버호벤 감독의 종교에 대한 오래된 관심을 <로보캅>에서도 역시나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머피의 끔찍한 죽음은 그가 로보캅으로 부활하기 이전에 거쳐야만 했던 십자가형에 비견될 것이고, 마지막에 권총을 행사하며 제강 공장의 물 위를 걷는 로보캅의 모습은 미국 버전 예수의 완벽한 부활이라 칭해도 될 것입니다. 실제로 폴 버호벤은 네덜란드에 있던 당시, 성서 역사연구학회인 '예수 세미나'의 회원으로 예수의 삶에 대한 연구를 했고, <예수의 역사적 초상>(2010)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활의 아이디어에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순수성(Purity)’이 있기에 예술적 측면에서는 당연한 ‘진실(Truth)’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믿음은 SF 장르의 사이보그 인간에서 시작되어 <엘르>(2016)를 거쳐, <베네데타>의 수녀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네요.












메탈릭 크롬 아머

 초기 프로덕션 과정에서 로보캅 디자인은 영화 ‘스타워즈’의 C3PO와 ‘메트로폴리스’의 로봇으로부터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모티프로 삼은 일본의 특촬물 ‘우주형사 갸반’이 있는데, 실제로 토에이 영화사로부터 디자인 차용을 위한 허가까지 받았다고 하네요. 허나 초기 디자인의 결과물은 로보캅의 컨셉과는 굉장한 괴리가 있어 뒤늦게 전면 수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이때 새로운 디자인에 결정적인 영감을 준 것이 바로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소라야마(Hajime Sorayama)의  Sexy Robot 이라는 책입니다. 이 크롬 소재 로봇 디자인 덕분에 실버 메탈릭톤의 매끈한 아머가 로보캅 하면 떠오르는 시그내쳐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전의 메카닉들에게는 없던 섹시함까지 갖추게 된 셈이지요.


(좌) 일본 전대물 <우주형사 갸반> (중)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소라야마의 ‘섹시로봇’ 일러스트 북 (우) 로보캅 디자인



로보캅의 실물 코스튬 제작은 영화 더씽(The Thing) 에서 활약한 바 있는 특수효과의 거장 ‘롭 보틴(Rob Bottin)’이 맡았습니다. 고어(Gore)적 연출에 특화된 그의 천부적 재능은 머피가 무참하게 죽는 장면과 극 중 빌런인 에밀이 화학약품을 뒤집어쓰고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는 모습을 구현해 내는 것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육중하면서도 빛나는 로보캅 아머의 아름다운 디테일은 롭 보틴의 평소 그로테스크한 연출과 더욱 대비되는데, 이는 거장의 완벽주의에서 잉태된 또 다른 산물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실제 그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해 제작에만 6개월이 걸려, 애초 일정보다 많은 지연이 되는 바람에 촬영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모두가 야외에서 주연배우 피터 웰러 (Peter Weller)가 로보캅의 모션을 연습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하죠. 웬만한 히어로 코스튬들도 착용에 몇 시간씩 소요된다고는 하지만, 로보캅 아머의 경우는 착용에만 12시간 이상, 그러니까 반나절이 걸렸다고 하니, 롭 보틴의 완벽주의가 착용시간까지는 미처 고려를 못했었나 봅니다. 특히, CG 없이 구현해낸 헬맷을 벗은 로보캅의 맨 얼굴은, 기계적이면서 인조적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은 없이 이질적인 느낌만 남아, 지금 보아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로보캅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좌,중) 특수효과의 거장 롭 보틴(Rob Bottin)과 그가 디자인한 로보캅 아머 및 스케치, (우) 머피가 살해당하던 당시 맞은 총알까지 놓지지 않는 특수분장의 디테일.



재미있게도 일본의 메카닉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로보캅은 거꾸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1988)의 잉그램 등과 같은 일본의 아이코닉한 메카닉들 디자인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일본과 미국 사이에 서로의 캐릭터 컨셉 디자인, 심지어 스토리에까지 주고받는 영향은 현재의 팝컬처 내에서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로보캅의 허벅지 권총집(좌)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 애니메이션 패트레이버 잉그램의 종아리 권총집 (우)









주연 배우의 입술

두꺼운 코스튬에 들어갈 만큼의 충분히 왜소한 체격에,  30kg 달하는 아머 안에서  시간이고 연기할  있는 체력, 그리고 판토마임 전공자이기까지  피터 웰러(Peter Weller) 기계적인 움직임을 구현해내야 하는 로보캅의 역할에 그야말로  들어맞는 배우 감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마임 스승으로부터  달간 코칭받은 몸동작은 도저히 로봇의 움직임이라고는   없는 발레와 현대무용의 움직임에 가까웠다고 하지만, 그는 촬영장에서 오직 로보(Robo)로만 불러지길 원할만큼 맡은 역할에 몰입하였고,  결과 시대를 뛰어넘는 SF 메카닉 아이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피터 웰러에게서  무엇보다 빛을 발한 것은 그의 도톰한 입술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전할 수 있는 감정들은 있는 힘껏 입으로 말해요..


차가운 금속 아머 사이에서 인간의 온기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관은, 극 중에서 유일한 약점이라고 언급되기도 했던 연약함만큼이나 로보캅의 감정이 유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리부트 ver. <로보캅>(2014)의 경우, 하관뿐만 아니라 손까지 노출되었는데, 이는 로보캅이란 캐릭터만의 매력을 반감시킨 최악의 ‘수’가 아니었나 사료된다. 인간형 사이보그라기보단, 아이언맨처럼 슈트를 입은 인간으로 묘사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이보그이지만, 설정상 인간의 신경계가 살아있어 고통까지 느낄 수 있는 로보캅이기에 그 모든 감정을 입 모양으로 연기해야 했던 것이었고, 이는 말하자면 마스크로 입을 가린 역할을 자주 맡던 톰 하디가, 오직 눈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앙 다문 입술부터 꽉 다문 이빨까지… 그렇습니다, 로보캅의 외형은 크롬 실버 메탈릭이 완성시켰다면, 로보캅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피터 웰러의 입술인 것이지요. 실제로 폴 버호벤이 말하길, 로보캅 헬멧에 꼭 들어맞는 ‘마네킹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피터 웰러의 캐스팅 이유로 꼽기도 했습니다.


피터 웰러 이후의 주연배우들의 입술을 보면, 얼마나 그가 독특하고 유니크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있다. 다른 배우들의 얇고 긴 입술보다 훨씬 더 여성적이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말하는 로보캅’ 장난감.. 배터리가 떨어지면, 로보캅은 입을 잃었다. 입술이 로보캅의 생명 그 자체였다는 걸 말하는 완벽한 은유인 셈..







연출의 백미

영화 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연출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출처 : YouTube 채널 clips2evoke)
비닐이 벗겨지면서 1인칭 시점 카메라로 눈을 뜨고, 서서히 일어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옆의 모니터 스크린에서 로보캅의 옆 모습이 짧게 스쳐 지나가고, 이윽고 경찰서 안 불투명한 창문 너머 흐릿하게 걸어가는 형상, 이어서 드러나는 뒷모습. 마침내 유치장 철망 너머로 드러나는 앞모습.

차분하지만 참으로 강렬한 첫 등장이자, 그야말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테이크입니다.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
Dead Or Alive, You’re Coming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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