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김동령⋅박경태
불가해한 진실이자 거짓말 - 난둘
꽃분이가 또 다른 꽃분이에게 욕설을 날린다.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고 여성을 성적으로 비난하는 욕설이다. 저 욕설을 어떤 이에게 들었을지 예상되는 욕설이다. 그래서 일면, 이 상황은 충격적이다. 서로의 처지를 알고 있는 이들이 서로에게 ‘자주 들었을 법한 욕’을 날린다. 그러나 이 충격의 일면을 뒤집어보면, 기지촌 여성들이 비슷한 삶을 살아왔으니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어야 한다는 그릇된 바람이 깔려 있다. 이러한 그릇된 바람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모든 생각이자 개념이자 관념을 흐트러뜨리는 데 관심을 둔다. 영화의 장르는 다큐멘터리이자 ‘오드’ 판타지로 분류돼 있다. 실제 기지촌 여성 박인순이 등장해 자신의 삶을 들려주기에 다큐멘터리이기도 하지만, 그를 인터뷰하는 인터뷰어와 박인순 앞에 등장한 꽃분이와 저승사자, 미군은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 그리고 박인순이 만들어진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이름도 없이 기지촌에 살다 죽어간 여성들, 그래서 기지촌에 지박령처럼 머무는 여성들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저승사자들이 적당히 만들어 낸 이야기를 미군의 잘려 나간 머리처럼 잘라내 버린다.
그건 거짓말이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
영화의 마지막 씬, 박인순이 저승사자를 쳐다보며 말한다. “넌 가짜잖아.” 그러자 저승사자가 대꾸한다. “잘 생각해 보거라, 난 가짜가 아니다.” ⋯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죽어라!” 저승사자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알려야 한다는 이유로 박인순을 찾아왔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박인순이 해 주길 바라며, 어쩌면 박인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지촌 여성이라는 틀에 맞추어 변형시킨 누군가 이자 (그 누군가의 말을 의심 없이 믿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박인순은 저승사자가 ‘가짜’임을 알고 있으며 저승사자는 분명 만들어진 인물이지만, 저승사자는 가짜가 아니라고 말했으며, 그가 가짜임을 아는 박인순 또한 저승사자와 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인물이지만 실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불가해함을 매끄럽지 않게 보여준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지속해서 팔로우해 온 사람들의 노력을 무너뜨리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감독인 김동령, 박경태 또한 <거미의 땅>, <나와 부엉이>, <아메리칸 앨리> 등으로 박인순을 비롯한 기지촌 여성의 삶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아 왔다. 영화는 다만 익숙함을 거부하고 한 개인의 오드함, 즉 이상하지만 다양한 측면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거미의 땅>의 마지막 씬에서 등장한 미러볼에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나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 다양한 ‘면’들이 있는……
다시 꽃분이들의 욕설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에서 혐오 발언의 규제 대신 그것의 맞대응을 제안한다. 쉽게 생각하면 권력자들의 말을 똑같이 수행해 충격을 주는 ‘미러링 전략’이지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이는 수행될 수 없다. 기지촌에서 권력을 지닌 자들은 누군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군? 포주? 양색시를 욕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방관해 온 사회? 영화 속 시공간이자 현실 그 자체에서, 기지촌의 모든 상황에 권력을 지닌 자는 누군지 정의할 수 없으며, 그러한 혐오 발언의 발생 원인 또한 추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왜 꽃분이는 꽃분이에게 욕을 했을까. 버틀러는 말은 언제나 변화하고 탈선하기에, 이러한 발언의 실패는 오히려 이러한 혐오 발언을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즉 꽃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오히려 듣는 이에게 불편함을 선사한 욕설 장면은, 그 추적 불가한 권력의 기원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불가해함. 미군의 머리처럼 숭덩숭덩 썰려나감. 박인순은 자신을 인터뷰하는 사람들에게 성매매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씹딘미”라고 대답해 왔는데,“씹딘미”는 기지촌 은어로 “fuck, its up to me”, 즉 “다 내 맘이야”라는 뜻이다. 박인순은 결코 성매매와 관련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아 온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힘든 그림을 그려 왔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고 창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스크린 속 거대한 환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제야 그녀도 사람 중 일부가 된 것 같아 편안히 쉴 수 있었다. 내 맘대로 살고 싶지만 언제나 내 맘처럼 되는 것은 없었지. 그래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삶을 커다란 환영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렇기에 그 환영이라는 전략은 어쩌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맞대응하는 무언가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참으로 좋다.)
연대는 아닌 모호한 불경함의 공유 - A
‘성의 방파제’란 일본이 국가 주도의 매춘을 공적 장에서 사용하던 단어로, 국가가 관리하는 매춘 여성으로 하여금 소위 일반 여성의 정조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후 일본의 첫 국책 사업으로서 방파제론을 기반으로 조직된 매춘은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고, 이는 비단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경제 개발을 내세우던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도, 국가와 시대를 특정하지 않더라도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급해온 우매한 남성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어온 일이었다. 여성의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적합하다 여겨지지 못하고,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이야기”들만이 파헤쳐진 뒤 드러난 뼈다귀들이 자신의 여기 있음을 알리려는 듯 서로 부딪히며 휘휘 내는 소리처럼 새어 나올 뿐이었다. 무명의 여자들 사이에는 노잣돈이 없이 저승사자들이 자신들을 끝까지 데려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참을성 없는 여자들이 아홉 고개를 끝내 넘지 못해 지옥 관문에 도달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축축한 땅 ‘뺏벌’에서 미상의 꽃분이와 꽃분이의 죽음, 순결한 딸 윤금이와 윤금이의 죽음 - 윤금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다 - , 박인순과 박인순, 여자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죽음을 통해 전승되고 뒤엉킨다. 이름을 통해 미군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몸을 허가받게 되었으나, 이름의 이야기들은 너무 많이 뒤섞인 탓에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그 진실로 여자들의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뺏벌에서도 가장 많은 죽음을 목격한 박인순씨의 이야기는 국가배상소송을 도우려는 여성 단체의 교수를 통해 기술되려 한다. 교수는 박인순씨의 첫 기억에서부터 시작해보지만, 박인순이 되기까지의 기억은 명확하지 못하다. 박인순씨는 인터뷰가 끝나고 이름을 적고, 이름 옆에 서명을 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에 있다. 이때 서명 자리를 가리키는 손짓이나 그림에 제목을 붙여보라는 목소리는 기지촌의 여성을 둘러싼 담론 내부에도 여러 알력이 경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연출인지 아닌지 모를, 박인순씨의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의지가 애초에 없는 듯 그림을 거꾸로 제시하는 이 장면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으로 엉켜 있는 일관성 없는 진술이 피해자의 피해자성을 가리지만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을 흘러나오게끔 하며, 또한 깨끗한 보지나 순결한 창녀 혹은 더러운 처녀라는 기지촌 여성을 향한 제목 붙이기는 판별되는 것도, 되어야 하는 것도, 판별할 수도 없는 문제임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은 흰색 원피스를 입은 꽃분이 1과 2, 꽃분이1은 클럽의 바텐더로, 미술작가는 저승사자3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여성들의 얼굴이 겹쳐지고, 식별불가능하게 되며, 그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고, 마치 동료가 귀신을 숨겨주면 저승사자들이 쉽게 데려가지 못하는 것처럼, 연대는 아닌 모호한 불경함을 서로 공유하도록 한다.
박인순씨를 다큐멘터리의 대상이자 참여자로 등장시켰던 <나와 부엉이>, <거미의 땅>과 같은 전작들에서 언제든 몸을 팔겠다는 (증언으로) 부적합한 말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텅 빈 장소를 트래킹 하던 영화는 마치 길을 잃은 영혼이 숲에서 동료들의 혼을 애타게 부르는 의식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기억이 그대로 보존된 클럽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트래킹 하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주는 정승처럼, 마을을 수호하는 당산나무처럼 변하는 도시를 우뚝 지키고 선 채 바라보는 듯 보였다. 이 영화의 변화가, 궤적이 씩씩하게 걷는 박인순씨, 강해서 살아남은 여성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
무능한 역사, 그리고 어떤 이야기 - 서너시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역사(History)의 개념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의 역사는 다양한 여러 사실과 사건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모아놓은, 전체적인 응집력과 일관성이 약한 ‘이야기 모음집’에 가까웠다.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험 주체(‘누구의’)나 서술 대상(‘무엇에 대한’)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던 ‘역사들(histories)’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공식적인 집합 단수로서의 대문자 역사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 일반’으로서 대문자 역사가 근대적 역사 개념으로 확대되면서 하위 역사로서 개별 ‘역사들’은 명료하고 통일성을 가진 거대 서사 아래 제외되고 무시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역사들’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는가? 심지어 ‘증명 가능한’, ‘공적 기록’으로는 도저히 쓰여질 수 없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택한 방식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의정부 기지촌 여성들의 혼을 불러내는 것이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될 수 없는 그림들과 모호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귀신, 저승사자와 같은 ‘허구적’ 이야기 요소들은 이 영화가 ‘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증명해줄 역사적 증거로서 가치가 없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역으로 역사에는 반드시 실증적 가치평가체계가 작동할 수 없는 무능력의 영역이 있음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박인순씨의 기억들은 왜 그림이고, 이야기여야 하는가? 공적 기록-출생증명서는 그녀의 출생조차 증명할 수 없다. 모든 기록의 형식들은 박인순씨 앞에서 기능할 수 없으며, 무력해진다. 묘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부, 시야를 가리는 무성한 잡초를 걷어내면 거기에는 ‘꽃분이’라고 적힌 묘가 있다. 비록 우리가 기지촌을 향해있는 누군가의 묘들을 보면서 여기에 어떤 죽음이 있었음을 알게 되긴 하지만, 정말 망자의 이름인지조차 불분명한 이름 석자와 무덤은 망자의 기억을 보여주진 못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기억은 그들이 귀신이 되어 움직이며 욕설을 내뱉을 때 비로소 보여질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떤 기억이 증명되기에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억 앞에서 ‘증명’이란 너무나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것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의정부 기지촌 여성들의 역사를 증명할 수 없기에 차선책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증적 대문자 역사는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인순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관되고 명료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폭력의 기억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닿을 수 없는 것을 그려내고, 이야기하며, 연기해내는 것이다.
의정부 기지촌은 철거를 앞두고 있다. 미군부대는 나가고 신도시가 들어선다. 무속인들은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해 텐트를 친다. 의정부시가 약속한 대로 당산나무는 보존될지 몰라도, 폐허가 된 기지촌에 남겨진 ‘꽃분이’들의 흔적들은 남아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구전설화로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입과 입을 건너서, 스크린과 스크린을 건너서, 철거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