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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스텐즈 eXistenZ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1999


버츄얼 사피엔스 – A


교회가 망한 자리에 개발자의 목소리가 목사의 설교를 대신한다. ‘엑시스텐즈'의 위대한 게임 개발자인 알레그라 겔러는 예술의 12사도와 같은 12명의 게임 추종자를 플레이어로 선발한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 겔러는 엑시스텐즈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게임 시스템이라 말한다. 게임과 게임 시스템은 다르다. 게임이 화폐라면 게임 시스템은 자본이다. <엑시스텐즈>는 판타지와 다를 것 없는 종교적 신념 시스템의 자리에 게임 시스템이 대신하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시스템의 내용은 바뀌더라도 그 안에서 독립적으로 행위한다는 착각과 오인을 반복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합리성과 자율성 아래 인간을 통제해온 시스템에서 종교가 정신분열증적 근대 주체에게 정신병을 야기하면서도 완충제 역할을 했던 것처럼, 플레이어들은 버츄얼 게임 안에 포섭되기를 바라면서도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하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주체로 적절한 말과 액션 없이는 다음 스테이지로 절대 넘어갈 수 없으나 선택하고 행위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게임 내러티브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결말을 위한 행위, 생존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말에 다다르는 것만이  목적이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미 시스템에 완전히 스며든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하느님 아버지를 습관적으로 찾으며 바이오 포드도 갖지 않은 구 시스템 체제의 낡은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테드를 신의 자리에 있는 겔러와 게임에 참여시키면서 신체로부터 분리된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리얼리티의 세상과 더 리얼the Real의 세상의 구분이 설명될 수 없다면 현실 개념 자체가 재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질문한다.


게임은 중추신경계의 전자 에너지로 작동되는 포트에 접속함으로써 플레이어의 개별 의식을 집단-의식으로 형성하며 시작된다. 즉, <엑시스텐즈>는 크로넨버그식 몸과 기계의 접촉뿐만 아니라 몸과 확장된 의식의 연결을 통해 집단의식으로 가능해지는 새로운 사피엔스의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겔러가 현실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 바이오 포드로 연결되어 있는 플레이어들은 겔러와 같은 환부에 근육의 경련을 느낀다. 이처럼 의식이 공유되며 집단의식이 형성될 때, 의식 아래 새로운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의식적 인지’가 중요해진다. 비의식적 인지는 케서린 헤일즈의 『비사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헤일즈는 “기계의 인간화가 아닌 마음의 기계화"를 이야기하며 유기체와 기술 시스템이 공유하는 유사성에서 인간과 기술의 상호작용을 해결한 탈인간중심주의적 실마리가 있다고 보았다. 비의식적 인지는 <엑시스텐즈>에서 중추신경계의 전류나 겔러와 플레이어들의 연결된 근육 반응처럼 생명 유지의 신체 활동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식이 인간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것과 달리 동물과 파충류 그리고 식물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엑시스텐즈>에서 게임 세상 안에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하나의 몸통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돌연변이 파충류처럼 인간종에게도 버츄얼 체험을 통해 현실이 왜곡되는 것만이 아닌  오히려 인간 정신의 새로운 비의식적 인지를 통해 그동안의 신체-인간의 통합적 인간을 재사유하도록 한다. 


이러한 영화적 상상력이 영화에서 현실주의자들을 오히려 현실에 가장 부적응자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게임 세계 안에서는 살인에 죄책감을 느끼나 대의라는 이름 아래 현실에서 테러를 실현해서라도 현실의 왜곡된 상을 지속하려는 모습은 여전히 종교 시스템 위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의 폭력과 파시즘적 행태와 다름 아니다. 현실주의자와 근본주의자 그리고 인지주의자까지, 그들의 모습이 가상과 현실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경계에서 한 축을 지독히 고수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여전히 시스템 내에서 독립적 인간이라는 착각과 오인을 반복하는 듯 보인다. 



로그아웃이 불가능합니다 - 서너시



<엑시스텐즈>의 가상현실은 구질구질하고 질척이며 더럽고, 기괴하다. 점액질의 양서류 수프를 먹는 테드의 모습을 보면 매혹은커녕 역겨움만 느끼게 된다. 제발 크로넨버그가 스필버그식 셧다운제(<레디 플레이어 원>의 결말)를 시행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가상현실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황홀한 낙원’이 아니다. 빨리 가짜로부터 탈출해 ‘진짜’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 심지어 이곳은 주인공 테드에게 혼란을 가져올 정도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현실과 유사한 악몽이다.

<엑시스텐즈>는 동명의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어 낸 게임 디자이너 엘레그라와, ‘현실을 왜곡시킨 죄’로 그녀를 죽이려는 현실주의자들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케팅 부서 직원 테드는 현실주의자들의 총에 맞은 엘레그라를 데리고 도피하는 과정에서 엑시스텐즈를 플레이하게 된다. 테드에겐 엑시스텐즈의 세계가 익숙하지 않고, 처음에 그는 “육체에서 분리되어”, “현실의 생활과 너무 멀어져 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한다.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중단”이라고 외친 뒤 테드는 자신이 있는 곳이 돌아오고 싶어 하던 그 ‘현실’이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여기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아. 나는 확신할 수 없어. … 당신(엘레그라)도 점차 게임 캐릭터인 것처럼 느껴져.” 여기서 우리는 테드와 동일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게 우스꽝스럽고, 더럽고, 기괴한” 가상현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사실 이게 ‘진짜’ 현실이었다면? "우리가 지금 게임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죠?” 테드와 함께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점점 더 가상현실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엑시스텐즈>의 결말에서 엘레그라가 게임 디자이너라는 것과 테드가 마케팅 직원이었다는 것조차도 가상현실 게임의 역할극이었으며 이전의 모든 끔찍한 일들이 사실 모두 게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안도의 순간, 드디어 악몽 같은 가상현실로부터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영화는 ‘진짜’ 게임 디자이너인 노리쉬를 포함하여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현실주의자’ 엘레그라와 테드를 보여준다. 곧 희생될 게임 참여자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두 현실주의자들에게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다. “이봐, 진실을 알려줘. 우리 아직 게임 속에 있는 거야?” 


영화 전반에 걸쳐 <엑시스텐즈>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주의자’들이 느낄만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질까 봐, 가상현실이 현실에 대해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까 봐 걱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결말에서 현실주의자들이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누게 한 뒤 관객들을 현실주의자들이 처단할 대상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현실주의자들의 반대편에 앉힌다. ‘역겹고 끔찍한’ 가상현실을 반대하는 현실주의자는 왜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질까? 바로 현실주의자들이 혐오하는 기술, 현실을 왜곡하는 가상현실은 현실의 육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엑시스텐즈>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척추에 총으로 구멍을 내어 포트 플러그를 삽입하는 외과적 수술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계와 피부로 접촉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몸속으로 기계를 들여와야 하는 것이다. 테드는 가상현실 속에서 육체와의 분리를 걱정했지만 사실 <엑시스텐즈>에서 가상현실과 현실을 잇는 매개는 육체이다. ‘게임 포드 생산 공장’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엑시스텐즈 밖의 신체는 엑시스텐즈 안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감염된다. 가상현실이 감염된 것이라면 인간의 몸 역시 그렇게 된다. 병든 게임기로부터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끔찍하고 혼란을 주는 가상현실과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자들 역시 위협이 된다. 새로운 기술은 이미 사람들을 감염시킨 상태인데,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몸을 조각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주의자들은 감염된 몸의 부분(혹은 전체)을 잘라내 떼어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역시 가상현실이라는 병균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몸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다시 <엑시스텐즈>의 결말로 돌아가보자. ‘진짜’ 게임 회사 직원인 것으로 보이는 여자가 “모두 (현실로) 돌아왔나요?”라고 묻는다. 가상현실 속에서 서로를 죽이던 등장인물들이 모여 앉아 화기애애하게 자신이 플레이한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게임 디자이너인 노리쉬는 혼자 긴장된 표정으로 회사 직원에게 말을 건다. “나는 우리가 플레이한 게임 때문에 아주 불안해요. 이 게임은 안티 게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게임 디자이너에 대한 암살 시도로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는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노리쉬의 우려는 곧 현실화된다. 가장 위대한 게임 아티스트로서 현실을 왜곡시킨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엘레그라와 테드가 노리쉬에게 총을 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던 살인이 현실에서, 테드와 엘레그라의 몸을 통해 가상현실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 속에서 테러는 매체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전적으로 거부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1999년작인 <엑시스텐즈>를 다시 보는 지금,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一場GAME夢 - 난둘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이 게임 속 세계를 타파하기 위해 <트랜스 센텐즈>라는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트랜스 센텐즈>에 접속해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엑시스텐즈>라는 또 다른 게임으로 접속하게 되는, 게임 속 세계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npc이자 실제 인물에게 원하는 대답을 해 주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설정 자체가 현실과 다름을 보여주는 무언가로 작용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모든 이들이 게임 속에서 육체를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바이오 포드를 삽입하는 감각. 구역질 나는 생물체를 도려내는 감각. 더러운 음식을 씹어대는 감각. 이 모든 감각은 생경한 것을 목도했을 때 순간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몸의 체계와 합쳐져 관객들에게도 전염된다.


그러나 현실의 몸이 잘 보존돼 있어야 게임 속 세계를 즐길 수 있다. <엑시스텐즈>의 알레그라는 “몸은 현실 어딘가에 잘 놓여 있을 테니 게임을 즐기자”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엑시스텐즈>의 파이쿨은 “게임 중지!”를 외치며 (게임 속) 현실로 돌아간다. 현실로 돌아온 알레그라는 재미없는 이곳을 떠나 다시 게임에 접속하자고 말한다. 현실이 재미없다. 이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자의 발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알레그라는 현실에 누구보다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 게임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여러 문제점을 발견해 그것을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다. <엑시스텐즈>에서 알레그라가 단순한 플레이어였다면 이 발언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왜 알레그라는 자꾸만 파이쿨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이고, 게임 속에서 현실이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일들 - 살인 같은 - 을 벌이는가? 애초에 그녀가 게임에 접속하고 싶지 않아 했던 파이쿨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파이쿨은 왜 그녀의 말에 순응해야 하는 사람처럼 순응하고 마는가? 알레그라가 <엑시스텐즈>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트랜스 센텐즈>라는 게임을 없애기 위해 파이쿨과 함께 잠입한 현실주의자라는 사실은 영화 막바지에야 밝혀진다. 결국 영화는 내러티브의 느슨한 인과관계의 이유를, 영화의 처음부터 끝이 게임 속 세계를 구현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현실에 천착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엑시스텐즈>라는 게임(이자 영화)에서 반-현실주의자와 현실주의자는 양분된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렇지 않다. <트랜스 센텐즈>의 디자이너 예프게니 노리쉬는 <엑시스텐즈> 속에서 또 다른 게임을 만드는 회사인 코스칼 시스테마틱의 이중 첩자다. 그 게임을 알레그라와 파이쿨에게 판매한 게임 백화점 사장 네이더는 코스칼 시스테마틱의 첩자로 현실주의 지하운동가다. 알레그라와 파이쿨은 자신들이 <엑시스텐즈> 라는 게임 내에서 또 다른 게임에 접속했다는 사실을 잊고 <엑시스텐즈>로 복귀했을 때 이를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만다.


느슨한 것처럼 보이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의 관계가 현실과 게임이라는 이분법을 어그러뜨린다. <엑시스텐즈> 속 게임에서 중국 음식점의 웨이터로 등장했던 이는 진짜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시공간)에서 <트렌스 센텐즈>의 관계자들을 쏘고 가는 알레그라와 파이쿨에게 질문한다. “우리 아직도 게임 속에 있는 거야?” 파이쿨이 <엑시스텐즈>에서 사람들에게 총을 쏜 알레그라에게 했던 말이 즉각 떠올려진다. “우리가 게임 속에 있지 않다면 당신은 현실에서 살인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 게임 속에서 벌어진 일인 것으로 밝혀진 <엑시스텐즈>의 디자이너 알레그라 갤러를 죽이고자 동물의 뼛조각과 사람의 이빨로 만든 총을 쏜 노엘의 모습과 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 현실 또한 게임인 것인가? 사실 영화가 계속되는 내내 게임은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게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로 게임이라면, 게임을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느슨한 인과관계라든지, 일어나지 않았을 법한 일이라든지, 원하는 말을 들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든지 등은 현실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것이 현실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저 감각뿐이라고, 그 감각을 현실에서 느끼든 게임에서 느끼든, 오직 그것뿐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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