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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2021, 박찬욱 

절대 헤어지지 않으리란 결심 - 난둘 


<헤어질 결심>에서 눈은 카메라 렌즈로 기능하지 못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기도수씨의 눈은 사건 현장을 찾아온 해준과 수완을 기록하지만, 자신을 절벽 아래로 내몰았을 사람의 기록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불완전함에 관한 기록을 시작한다.


불면증에 시달려 인공적으로 수분을 보충해야 하는 해준의 눈은 카메라의 렌즈를 보조 장치로써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 또한 증거를 찾아내는 장치로써 남지 못한다. 해준은 서래의 상처를 사진 찍어 기록한다. 기도수의 수집욕을 보여주는 서래의 문신과, 서래의 얼굴 모두. 해준은 서래의 월요일 일터를 찾아가 망원경 렌즈로 서래를 관찰하기까지 한다. 렌즈로 맞은편의 누군가를 훔쳐보는 것은 당연하게도 히치콕의 <이창>을 떠오르게 하며, <이창>의 소재이기도 한 관음증은 해준의 숨소리와 자극-화 된다. 자극-화 된 해준의 관음은 일견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를 훔쳐보는 해준의 숨소리. 이때 영화는 해준의 관음증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서래의 일거수일투족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람에게 완전해 보이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영화는 해준의 불안전함을 극대화한다고 말하고 싶다. 해준은 애플워치를 활용해 음성으로 사건 일지를 기록한다. 흔히 기록은 문자화 되어 남는 것으로 여겨진다. 음성은 원래 휘발되는 것으로써 기록으로 남을 만하지 않다. 하지만 장치의 발달로 오늘날 음성은 영원히 남는다. 사실 이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 즉 해준의 사진 기록 또한 마찬가지지만, 영화는 눈으로 보는 기록보다 음성 기록에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해준의 모든 미결 사건의 사진들은 해결되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서래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기록을 해준 앞에서 불태우지만, 해준은 그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해준은 이미 서래에게 심장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결국 해준의 관음증, 즉 훔쳐보는 자의 지위는 그 훔쳐봄의 대상인 서래에 의해 무력화된다. 이제 해준의 눈은 계속해서 말라갈 수밖에 없으며, 해준은 영원한 불면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해준은 자신의 모든 지위를 이포로 돌아가며 져버린다.


그 모든 지위는 서래에게로 돌아간다. 서래는 이제 해준을 따라 애플워치로 자신의 음성을 기록하며, 해준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포로 향하며, 해준과 다시 만나기 위해 살인 사건을 저지른다. 하지만 해준의 지위를 서래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해준의 온전해 보이는 삶, 이를테면 최연소로 경위에 승진한 엘리트,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아내,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자식 같은 요소들은 서래에게 없는 것이다. 협박을 일삼으며 폭력을 휘두른 첫 번째 남편, 사기를 치고 다니며 자신을 또 다른 폭력의 위협에 빠뜨리는 두 번째 남편.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은 해준. 자신의 깨끗함을 말하며 그 관음증을 정당화했지만, 결국 자신의 붕괴를 토로하고 떠나버린 사람에게 사랑에 빠진 서래.


그렇지만 서래는 훔쳐보는 자가 아닌 바라보는 자다. 그렇기에 서래는 결국 모든 것을 붕괴당한, 사랑하는 누군가-들에게 배신당한 해준과 달리 자신을 사랑한 누군가-들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서래는 고소공포증이 있음에도 암벽을 등반해 첫 번째 남편을 살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며, 자신을 무자비하게 때린 남자를 이용해 두 번째 남편을 죽이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며, 자신이 깨끗하다 말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미제 사건을 남긴 사람이다.


영화가 해준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주었던 미묘한 찝찝함은, 영화가 해준의 모든 지위를 서래에게 넘겨줌에 따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찐득함으로 변화한다. 이는 또한 서래가 이 감정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에 가능해진다. 서래는 아무리 모래라도 깊게 굴을 파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양동이를 들고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굴을 파낸다. 단순한 영화적 허용일까? 무용해 보이는 도구로 서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해준의 모든 장치는 유용해 보였지만 결국 무용했다. 해준은 헤어질 결심을 한 것처럼 서래를 떠났지만 해내지 못했다.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결국 해준의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은 카메라, 스마트폰, 애플워치 등 모든 유용한 장치, 요즈음 두 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을 지닌 영화를 지루하게 만든 디지털 장치들을 무력하게 만들며, 자신을 본 관객들이 영화라는 무용한 예술과 절대 헤어질 결심 따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어요. - A 


당신은 품위 있어요, 현대인치고는. 

1부와 2부, 청록색 원피스,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건너편의 아파트, 고소공포증과 미스터리 … 이 영화가 히치콕을 상기시키려 할 때, 그 사이에 있는 <환송대>를 떠올려본다. <현기증>을 19번이나 보고 만들었다는 <환송대>는 3차 세계대전 이후 포로로 잡힌 남자가 시간여행 실험으로 과거로 돌아가 유년 기억 속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크리스 마르케의 SF 영화다. <현기증>과 <환송대>, 두 영화에는 모두 나이테를 보는 장면이 있다. 매들린이 주요 사건이 표시된 커다란 나이테를 가리키며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시간과 연인이 나이테의 시간 바깥을 가리키는 시간은 불가능한 시간이거나 시간의 바깥이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가 겹쳐지고 어긋나 <현기증>과 <환송대> 그리고 1부의 부산과 2부의 안개 자욱한 가상의 도시 이포에서 진행되는 <헤어질 결심>은 닮아 있다. 절에서 ‘현대인’과 ‘종족’과 같은 말을 주고받는 두 인물, 공간을 뛰어넘어 아파트 안에서 떨어지는 담뱃재를 받아주는 해준, 과거로부터 혹은 미래로부터 도착한 어긋난 감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처럼 보이는 <헤어질 결심>을 포함한 세 영화가 정신적 이미지로 진행되는 시간여행이라면, 위장에 능한 서래가 사랑으로 죽지 않고 사랑으로 어디선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어요.

취조실 거울에 해준과 서래가 비친다. 해준이 말할 때는 서래의 초점이 맞지 않고, 서래가 말할 때는 해준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프레임 속 해준과 서래의 모습이 비치는 취조실의 거울 너머에는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없으므로 보이지 않으나 그들과 보고 있을 미진과 수완이 함께 있을 것이다. 안과 밖, 거울이라는 막. 영화와 관객, 스크린이라는 막. <헤어질 결심>은 함께 있으나 절대 서로를 볼 수 없는 영화와 관객에게 망자와 사물의 시점을 빌어 사랑의 자리를 내어준다.


초점의 이동으로 분절되는 하나의 프레임처럼, 바깥에서 안을 보는 모니터 역시 분절되어있다. 모니터는 고전적 영화 문법에 충실한 쇼트와 역쇼트로 촬영된 취조실 인물의 수직적인 90도 쇼트를 180도라는 하나의 평면으로 이어 붙인다. 정교한 영화적 문법을 통해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동선이 정교하게 계산되어야 하는 촬영장과 달리,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시공간을 연결할 필요가 없는 취조실 촬영의 가상선은 인물의 갑작스러운 이동과 움직임으로 무너져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인물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거나 때로는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을지라도, 모니터 스크린을 보는 관객 - 또는 모니터링 중인 형사들 - 은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피살당하자 사람들이 이런 일을 뭐라 생각할 것 같냐고 묻는 해준에게 “참, 불쌍한 여자네.”라고 대답하는 모니터 속 서래를 보고 웃는 연수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아량껏 내어주는 관객의 자리는 <이창>의 차양막을 올리고 내리며 편안한 소파에 앉아 반대편의 아파트를 훔쳐보는 제프리의 관음적이고 수동적인 시선이 아니라, 오히려 해준과 서래로 하여금 스크린 바깥까지 흘러넘치는 사랑의 수신자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가 찍는 리얼의 세계가 사라지고, 관객들이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 영화는 누벨바그 감독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관객에게 말을 걸어 오히려 거리두기 하던 것과는 달리 리얼과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초-리얼의 흡착을 자연스러운 것 마냥 너스레 떨며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 이제는 그들에게 영화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이론에서 봉합은 쇼트와 역쇼트의 연결로 관객에게 부재하는 시점숏의 대리인 자격을 부여하여, 스크린의 현실을 하나의 완전하고 무결한 관객의 현실로 오인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수동적 관객의 자리는 히치콕과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러한 봉합의 간극을 오히려 내버려 두고 거울이나 유리창 또는 비가시음성체와 같은 ‘인터페이스-스크린’을 통해 세상이 하나의 무결한 논리가 아니라 결핍 그 자체라는 것을 폭로하고, 결핍 자체로서의 의미로 격상시킨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쇼트의 간극은 행동과 행동으로 매워지거나, 메타적인 스크린 - 엑스레이, 거짓말 탐지기, GPS, 스마트폰 액정, 생선의 눈, 납골함의 시점 - 이라는 고전적 영화 문법을 깨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비인칭적 사물의 시점으로 스크린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관객에게 결핍 그 자체, 그러니까 미결이 세상(사랑)의 논리라는 점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영화에서 인물에게 관객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시선은 딱 한 번이다. 서래가 판 구멍 위에 해준이 신발끈을 묶을 때, 아래로 내려와 해준을 올려다보는 카메라. 관객은 이것이 서래의 시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리는 서래가 바다에 미리와 표시해놓은 장대가 던져진 자리다. 우리는 장대라는 객체의 시선에서 서래를 찾아 더 깊은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해준을 보게 되고, 이것이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아량껏 내어진 관객의 자리라는 것이다.


모래를 파내자 바다 위 작은 모래와 산이 또 다른 우주를 형성한다. 금방 붕괴될 결핍의 모래성. 무너지고 깨지는 것이 붕괴의 뜻이고, 그것이 사랑을 의미한다면,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헤어질 결심은 난둘의 말처럼 절대 헤어지지 않을 미숙한 결심으로 느껴진다. 


눈과 귀를 지나서, 코와 피부로 감각하는 - 서너시


하루종일 비가 왔고, 공기 중엔 특유의 젖은 비 냄새가 났다. 살짝 차가운 습기와 한 손에 느껴지는 우산의 무게감, 그리고 손으로 전달되는 빗방울들의 작지만 계속되는 부딪힘까지. 비 오는 날이면 경험하게 되는 그 많은 감각들을 순식간에 무화시키는 곳이 있으니, 바로 영화관이다. 상영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약간은 먼지 냄새 같기도 한 퀘퀘한 영화관 냄새, 밖에 비가 오든말든 뽀송뽀송하다 못해 건조하게 공기를 말려버리는 에어컨 바람. 어두운 복도를 지나 상영관 안으로 들어서면 외부와는 단절되는 묘한 공기를 만나게 된다. 어두움과 조용함만이 다가 아니다. 눈과 귀가 아니라 코와 피부로 감각하는 공간의 변화가 있다.  


영화가 시작되자, 영화관 특유의 공기 역시 또다시 지워지고 그 위로 새로운 감각들이 덧입혀진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헤어질 결심>에 대한 개인적인 영화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와중에, 느껴지던 이 후각의, 촉각의 감각에 대해서. 


해준은 초밥을 찍어먹기 위해 뚜껑을 따고 간장을 따른다. 플라스틱으로 된 간장통이 해준의 손 끝에 눌리면서 쿨쩍이는 소리와 함께 흐르는 간장은 클로즈업되고, 그 소리가 조용한 취조실에 울려퍼진다. 눈과 귀를 지나서, 코 아래로 간장의 짠내가 퍼져나간다. 서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을 눕히고 호흡을 한다. 해준을 포함해 영화를 보는 모두가 서래의 움직임과 소리에 집중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안정적으로 반복되지만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숨소리. 어느새 서래의 리듬에 따라 숨을 내쉬고 있는 관객의 코 안과 폐를 지나, 몸 안팎으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스크린 속 인물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동일한 조건에서 행해질 수 있는 호흡, 그리고 관객에게는 공유될 수 없으나 상상되는 서래와 해준의 체취. 


<헤어질 결심>에서 후촉각적 감각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면은 해준과 서래가 핸드크림을 함께 나눠바르는 장면이다. 해준은 서래의 손이 튼 것을 보고 핸드크림을 꺼낸다. 분명 어떤 향이 나고 있을 촉촉한 핸드크림을. 핸드크림이 두 사람의 손에 묻고, 두 손이 아주 친밀하게 마찰하는 어딘가 묘하게 섹슈얼한 이 장면에서, 찐득거리고 치덕이는 소리와 함께 손과 코는 상상하면서 동시에 감각한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피부의 감각을, 향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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