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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이 Dec 13. 2023

결혼 5주년

결혼기념일 전날 밤 부부싸움을 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우리 부부는 참 많이 싸웠다. 아이로 인해 행복할 때도 많았지만 각자의 관심과 에너지가 온통 아이에게 집중되며 서로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있는 가정이라면 대개 비슷한 상황일 것... 같지만 모두가 이 정도로 싸우지는 않더라.


심하게 싸우던 시기에는 공황 발작이 왔다. 운전을 하다가 숨이 안 쉬어져서 차를 세우고 입에 진정제를 털어넣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갔다가 과호흡이 와서 공항에서 한참 주저앉아 있었던 기억도 난다. 싸우는 중간에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싸움을 중단해야 했던(!) 적도 있다. 너무 힘들어서 눈물로 읍소해도 남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듯했다.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싸움으로 이어졌다. 매일 칼을 들고 사는 것 같았다. 부부상담을 받았다. 상담 선생님이 중재를 해 주니 그나마 대화라는 게 성사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사이가 좋아질 순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같은 방을 쓰지도,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다. 그래도 더 많이 거리를 두고 싶었다. 심하게 싸운 날이면 집 근처의 에어비앤비와 원룸을 검색해봤다. 만약 따로 살게 될 경우, 남편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사업을 어떻게 정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따져본 적도 있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의 인스타그램을 하나둘 팔로우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 와중에 남편은 매주 골프를 치러 갔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직업이고, 육아 참여도도 높은 편이었지만 가정보다 골프가 우선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그는 골프에 '미쳐' 있었다. 돈도 벌 만큼 벌어오고 육아도 할 만큼 하는데 이 정도 취미 생활도 못 하냐고 했다. 골프냐 가정이냐 선택하라고 하면 이혼을 하자고 할 기세였다. 별 수 없이 나는 독박 가사와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가끔 가사도우미를 불렀고, 가끔 나가서 혼자 혹은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우리 부부의 삶에 제멋대로 끼어든 불청객 같은 골프와 1년이 넘게 속썩으며 지냈다. 골프는 단순히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취미 수준이 아니었다. 남편은 골프와 바람이 난 것 같았다. (골프 치다가 바람이 난 게 아니고, 골프 그 자체와 바람이 났다는 말이다)


거의 매주 18홀 라운딩을 가는 것은 물론 동호회 형님들과 일주일에 몇 번을 만나 스크린 치고, 뒷풀이로 술 마시러 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고 나면 피곤해서 며칠동안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물론이다. 골프 모임에 갔다가 코로나에 걸려 온 것도 무려 두 번. 그 중 한 번은 돌도 안 된 아기까지 옮아서 온 가족이 호되게 고생을 했다.


그렇게 살면서 이혼을 왜 안하냐는 말도 들어봤고, 심지어 상담 선생님도 이혼이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언급을 하셨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 있나. 싸울 때마다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반복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남편의 골프 열정도 슬슬 사그라들었다. 여전히 골프를 치지만 전처럼 미쳐 있는 시기는 지나간 것이다. 부부의 세계란 신기하게도, 서로 죽이지 못해 이를 갈고 으르렁거리던 시절도 시나브로 끝이 났다.


싸움이 줄어든 다른 원인은, 아이가 크면서 어른들과 식사 간격이 맞게 된 것이다. 교대로 아이를 먹이고 재운 뒤 야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싸움이 나곤 하던(...) 생활을 탈피해 최대한 7시 이전에 아이와 함께 식사를 마쳤고 이후에는 일체의 야식을 먹지 않았다. 예전에는 괜히 야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시도하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았는데, 야식을 먹지 않으니 아이가 없는 자리에서 얼굴 맞댈 일이 사라졌고, 대화도 싸움도 시작될 일이 없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어져 아쉬운 것보다 편한 게 컸다. 우리의 싸움은 '투닥투닥'이나 '티격태격' 수준이 아니었다. 물건만 안 던졌지 말이 칼처럼 날아다녔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싸움의 위험을 감수하고 붙어 있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 육아 이야기만 하고 마는 게 나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에는 각자 일을 하고 각자 밥을 먹고 각자 친구를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 없이 둘이서만 보내는 시간은 거의 전무했다.


기묘한 평화. 하지만 이런 평화는 임시적일 뿐이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육아 이야기, 사업과 가계의 문제를 상의하는 일 말고 진짜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모처럼만에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평소 궁금했던 맛집도 미리 예약해두고 점심부터 둘이서만 외출을 하기로 했다. 전날 저녁에는 오랜만에 남편 방에서 같이 드라마도 봤다. 그러다가, 결혼기념일을 몇 시간 앞두고 또 싸우고 말았다.


나는 외로웠다. 평소 우리는 8~9시 사이 육퇴를 하고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기는 분리수면을 하기에 자기 방에서 혼자 잔다.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각자의 TV를 보며 쉬고 각자의 침대를 온통 차지하고 잠도 푹 잔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같이 TV 보면서 치맥도 먹고 친한 척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남편 방에 얼쩡대며 드라마 같이 보자고 하다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르게 이미 싸워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전처럼 험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고, 비교적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긴 했다. 하지만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뇌의 회로가 자주 다닌 그 길을 기억하고 있어서, 아, 결국 또,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구나. 또 이런 식이구나. 그동안 우리가 싸우지 않았던 건 단지 마주치지 않아서일 뿐이었나, 역시. 어설프게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또 싸우고 말았네.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같이 살아야 하나. 역시 빨리 그만두는 게 나을까. 그럼 아이는 진짜 어떡하지 등등. 그동안 수십 수백 번 반복했던, 고통스런 생각의 쳇바퀴. 새벽까지 결론 없는 대화를 마치고 홀로 방에 돌아와서 울다 잠이 들었다.


결혼기념일 아침, 남편이 아이를 등원시켰고 나는 머리가 아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똑똑똑,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끽 하고 문이 열리더니 부스럭부스럭 비닐 소리가 난다. 국밥 시켰구나. 혼자 국밥 시켜 먹는구나. 냉장고에 반찬도 있고 국도 있는데. 또 음식물 쓰레기 생기는 거 싫은데. 짜증나 그거 또 누가 다 치우나. 남은 음식 버려지는 것도 싫고. 결혼기념일이라서 같이 어디 가자고 하더니 혼자 국밥 시켜 먹는 거 짜증난다. 어제 싸웠다 이거지. 나도 열받는다. 이놈의 집구석. 나가버리고 싶다. 혼자 어디 가서 하루 자고 올까. 같이 있어서 외로운 것보다는 혼자 외로운 게 낫다더니 정말이네. 외롭다 증말.


머릿속으로 결론 없는 사랑과 전쟁을 치른 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 배달온 것의 정체가 식탁 위에 있었다. 비닐 포장에 덮인 꽃바구니였다. "결혼 5주년을 축하합니다. 지금처럼 서로를 잘 챙기며 아기와 함께 건강한 가정 꾸려 나갑시다. 사랑하는 남편"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실컷 미워하지도 못하게. 짜증나 정말.


(그렇게 파국으로 치달을 뻔했던 결혼 5주년 기념일은 평화롭게 지나갔다는 이야기. 부부의 세계란 정말이지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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