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뿌듯해요. 오늘 저녁에는 드디어 보름 전에 사놓은 가지를 처리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가지를 튀겨야지.'
'오늘 저녁에는 가지를 튀겨야지.'
염불을 외듯 2주가 넘도록 했던 그 말-튀겨야지, 튀겨야지-이 내일부터는 쏙 들어갈 예정입니다. 물론 쏙 들어갈지 다시 가지를 사서 냉장고를 채울지 아직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살면서 '절대로' 또는 '다시는'이라고 묶어두는 것이 많다면 삶이 복잡해지잖아요. 저는 단순하고 담백하고 살고 싶거든요.
어쨌거나 오늘은 가지를 튀기기에 참 좋은 날이었어요. 오늘이 아니었다면 아쉬울 뻔했지요. 그러고 보면 가지가 보름씩이나 냉장고에 있었던 것은 오늘을 위한 선물이었을지도요. 왜냐하면 오늘은 핑계가 가지가지인 사람을 만났거든요. 이렇게 많은 이유를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음, 이 부분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네요. 설마 이런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이겠어요? 아마도 지나간 일은 훌훌 잘 털어버리는 편이라 마지막으로 털어내고 싹 잊은 후 처음 겪는 일이겠죠. 당연히 싹 잊은, 마지막 그 사람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요.
"여보세요, 어쩜 그렇게 못하는 아니, 할 수 없는 이유가 많으시죠?"
이유든 핑계든 변명이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여하튼 가지가지인 날에는 가지를 튀겨보는 겁니다. 이왕이면 반죽을 묽게 해서 바삭, 바사삭 소리가 입안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말이죠. 게다가 한 입 깨물면 기름이 쭈욱 흘러나와 입술이 반질반질해지는 그런 가지튀김은 바로 오늘 같은 날에 먹어야지요. 살찐다고요? 에이, 그래도 오늘은 가지 튀김을 먹기에 좋은 날인걸요. 안 그러면 언제 먹겠어요. 저라면 오늘은 놓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독자께서도 '넓고 넓은 바다 같은 마음'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정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셨다면 함께 가지를 튀겨봅시다. 깊게 생각해서 뭐 하겠어요. 그냥 맛있는 가지 튀김을 와사삭 씹어먹고 잊어버리는 거죠. 가지가지한 이유를 듣고 있느라 피곤했을 내 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지켜낸 내 마음을 토닥토닥 튀김옷으로 감싸주세요.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훌륭한 문장처럼 가지 튀김이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제야 생각의 방향이 나에게로 옮겨질 겁니다. 이 사소한 행동을 통해 중심을 잡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서요, 어서 냉장고 문을 열고 가지를 꺼내오세요.
제 가지는 아쉽게도 세 가지입니다. 하나만 더 있으면 '사가지'인데...... 그래도 분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세 가지만 해도 충분히 배가 부르더라고요. '사가지'는 무리입니다. 배가 터질지도 몰라요. 그러니 참으소서. 참으시고 이제 가지를 썰고 싶은 대로 썰어 봅니다. 저는 어슷 썰기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사등분이 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가지를 세로로 길게 사등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가로로 반을 한 번 더 잘랐지요. 왜냐하면 한 조각의 크기가 너무 크면 튀길 때 몇 개만 넣어도 팬이 가득 차는, 비효율적인 공간 활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생각도 하다니 벌써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나 봅니다. 좋아요. 이게 참 중요하거든요. 틈, 이 틈으로 새로운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이왕이면 즐겁고 좋은 생각을 한 방울씩 틈 사이로 넣어보자고요.
그럼 이제 깨끗한 비닐봉지에 썬 가지를 넣고, 튀김가루(혹은 소금 한 꼬집과 전분가루) 두 스푼 넣고 잘 흔들어줍니다. 놀이기구 탠버린 아시죠?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던 가지가 다시 생기를 찾고 싱싱(?)해지도록 신나게 탠버린을 태워주자고요. 서로 안고 그러는 가지들은 뚝 떼어놓으면서요. 오늘은 핑계가 가지가지인 사람을 만나 가지튀김으로 푸는 날이라 눈치 없이 껴안고 그러는 가지는 멀찍이 떼놓아야 합니다.
"껴안지 마!"
그다음, 볼에 튀김가루를 적당히 넣고 시원한 탄산수(가 없으면 얼음물, 얼음도 없다면 찬물)를 부어 튀김 반죽을 만들어줍니다. 튀김옷이 너무 두꺼워지지 않도록 농도를 쭈르르 흐를 정도로 묽게 만들어주세요. 그리고는 탠버린을 타고 하얗게 질린 가지를 이 반죽에 퐁당 담가줍니다. 튀김기에 부운 기름이 달궈지면 이제 가지를 살살 넣어줍니다. 이번에도 서로 껴안지 않게요. 이때는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해요. 우리의 몸은 소중하니까요.
가지가 80% 정도 익으면 튀김기에서 꺼내 망이 있는 트레이나 키친타월을 깔고 그 위에 건져 놓습니다. 가지튀김에게 휴식시간을 주어 재료가 완전히 익도록 그대로 두었다가 먹기 직전에 한 번 더 튀겨줬어요. 두 번째에도 기름을 서서히 달궈 튀김 온도에 다다르면 가지 튀김을 넣어 살짝(1분 정도)만 더 튀겨줍니다. 이때는 수분이 날리면서 기름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튈 수 있어요. 또 조심해야 해요. 아, 다 튀기고 나니 가지를 평소대로 썰 걸, 예쁘지 않아 아쉽네요. 그래도 입에 들어가면 소화되는 것은 똑같으니까 괜찮아요. 저는 냉장고에 그린빈이 있어서 그것도 함께 튀겼어요.
좋아하는 맥주를 하나 꺼내오니 진정한 완성이네요. 역시! 가지튀김은 언제나 맛있어요.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갈아 가지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넣어 튀겨도 맛있지만 그냥 가지만 튀겨도 정말 맛있어요. 버섯탕수육을 처음 먹었을 때 '유레카!'를 외쳤는데, 가지튀김도 비슷합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 이런 맛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게다가 그린빈 튀김도 찰떡궁합이네요. 가지튀김이 살짝 느끼해질 무렵에 그린빈 튀김을 하나 먹으면 입가심이 되는 것 같아요. 튀김에게 이런 표현은 정말 거짓말이겠지만, 개운해지는 느낌이라면 이 둘의 궁합을 짐작하실 수 있을까요?
맛있게 다 먹고 나니 설거지가 잔뜩이네요. 내 손으로 만들고 내 손으로 치우는 요리의 규칙을 통해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될 때에도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끼리 만나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야매' 인간관계의 법칙도 생각해 봅니다. 알고 보면 오해를 풀 만한 비슷한 점을 가졌을지도요. 역시 휴머니즘은 포만감에서 흘러넘치는 것이었어요. 핑계가 가지가지인 날에는 가지튀김에서 음식이 주는 위로를 찾으세요. 강력히 추천해요.
p.s. 브런치스토리 맞춤법 검사기가 '사가지'를 '싹수'로 바꾸라고 추천하네요.
싫어요. 이것도 가지에게만 어울리는 언어유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