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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Mar 18. 2024

있는 그대로를 보라, Avlokitesvara.

#존재 #인식 #Avalokitesvara


있는 그대로를 보라, Avalokitesvara.

얼마나 쉬운 말인가.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진리는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실제 경험으로도 가끔 그러하다. 그러나 쉬울 것 같은 이 길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리의 인식 앞에는 온갖 지식과 관념과 선입견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바르게 보기 위한 이 도구들이 오히려 바른 앎을 가리고 방해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러한 매개물이나 전제들 없이, 진정 진실과 직접 대면할 수가 없는가? 우리의 오랜 기억을 돌이켜 보면, 어릴 때 우리는 직접 세계와 만나며 배웠다. 온몸으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익히며, 순수하고 무구한 직관으로 세계와 소통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문화적 관념을 배우며, 본래 순수한 직관은 점점 빛을 잃고 말았다. 사회 문화적 요구에 타협하며, 자신의 자연 원리적 알과 요구needs를 유보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은 과연 온당한 노릇이었던가?

학자들은 이것은 권력과 문화에 의한 길들어짐, 나아가 자기 소외와 자기기만에 빠지는 모순이라고 말한다. 옛 선현들은 이를 두고 고민하여 철학을 세우고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종교를 설립했다. 붓다는 이 모순의 해결책을 어릴 때 본래의 인식 방법인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Avalokitesvara: 관자재 觀自在’에서 찾았고 가르쳤다.

있는 그대로 것에서 '패턴'을 찾고, 패턴이 이어지는 곳에서 인내로 '맥락'을 찾아, 다각도로 검토하고 검증하는 가운데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식의 원점회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다.

우선 이 명약관화한 이치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경험과 성공체험이 없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게으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며, 높은 톤의 음 자리에 주눅 들어 실수라도 할까 전전긍긍한다. 우리는 이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강제되며 마침내 굴복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기억해 보자. 우리의 이 '생각의 걸음마'를 포기한 결과가 얼마나 끝없는 굴종을 심어왔는지를. 그리고 다시 상기해 보자 우리는 '몸의 걸음마'를 배우기 위해 3,000번 이상을 넘어지며 실패를 무릅쓰고 본능으로 한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두 다리로 홀로 세상을 딛고 일어선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그랬을까?

이것 말고 길이 없었고, 누가 대신해 줄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근력을 키우고 균형감각을 익히며 뼈대를 튼튼히 만드는 일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는 혼자 설 수가 없음을 알았다. 이것은 남이 대신 할 수가 없는 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린 나이에 이 명백한 진리를 꾀를 내지 않고 오직 순직한 마음으로 실천했다.

생각의 걸음마도 꼭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3,000을 넘어질 각오로, 남이 던져준 알량한 지식과 고정관념을 삼키지 말고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패턴분석을 하여 스스로 맥락을 찾아, 자기의 수고로 검증에 검증을 더하여 앎을 깨치는 일이다.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하는 일상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미 경험 많은 우리는 엄정하게 검증만 잘하면 결코 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수고로움의 이유에 대해 절대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먼저 고요히 관찰하고- 찬찬히 패턴분석과 맥락을 읽어- 자기 힘으로 과감히 추론해 가설을 세우고, 꼼꼼히 시공간을 달리해 검증하는 습관을 지니는 일이다. 이렇게 검증한 크고 작은 진실을 땀 흘려 얻은 참된 자기의 앎으로 가져가는 일이다. 이것은 요즘 주목받고 있는 인공지능의 학습법이다. 그들은 이 지혜를 인간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이 일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어린 시절 '무조건으로' 걸음마를 배우듯이, 철든 지금은 믿음과 기대를 지니고 해보는 일이다. 무엇이 어려우랴. 이미 해본 일인데. 이것은 하나로 시작하여 그 주변을 입체적으로 살펴 봄으로써 100을 이루는 길이다.

시간을 좀 들이고 정성을 기울여야 할 뿐. 자꾸 하면 더 늘고, 가속도가 붙으면 더 빨라진다. 그래서 그리 멀지가 않게 갈 수가 있는 지혜의 길일 뿐이다. 이 길은 가장 느린 듯하지만 결국 가장 빠른 길임을 알게 된다.

홀로 설 각오를 할 때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 홀로 설 수가 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해 얼마나 번민하고 망설였을까. 그러나 이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며 가장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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