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하지 못할 거야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서 속죄는 대부분 불가능한 일로 묘사된다. 아닌 게 아니라 속죄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일뿐이고,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납득이 불가능한 행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속죄 말고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다.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는 한 소녀의 고백이고 속죄이며 상상이다.
우리는 초중반부를 보며 이것이 현실일 것이라고 믿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조금씩 허구라는 것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 대한 이질감을 반드시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은 바로 브라이오니가 언니 세실리아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고, 이 장면 이후에 우리는 여태껏 우리가 보았던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소설(브라이오니가 물질적으로 내놓은 속죄의 최종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브라이오니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과,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서 오는 안타까움은 전반부에서 느낀 브라이오니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분노를 덮고도 남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그래서 허구일 수밖에 없는 장면은 브라이오니에게 더없이 잔혹하다. '네 목을 꺾어버릴까, 계단에 집어던져버릴까 고민하고 있어.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는 몇이나 되어야 하는데?' 등등 이 영화의 허구에 해당하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폭력적인 대사와 비난, 그리고 뒤늦은 사과가 숨 막히는 고요를 틈틈이 끼고서 이어진다. 브라이오니는 그 장면에서 계속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한 말을 딱 한 마디 한다. "나는 그때 겨우 13살이었어." 그리고 소설 속의 로비(로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브라이오니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테다)는 이렇게 말한다. "18살이나 되어서야 네 거짓말을 고백할 수 있었니?"
저 장면엔 브라이오니의 모든 희망과 바람이 들어가 있다. 비난조차 받을 수 없게 된 브라이오니에게 스스로를 비난하는 저 장면은 일종의 탈출구였을 것이고 위안이었을 것이다. 브라이오니는 서로 사랑했던 두 남녀를 자신의 소설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도록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소설 자체가 기만적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소설을 쓰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브라이오니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속죄란 바로 그것뿐이었을 테다. 속죄의 타당성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죽었으니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고안해 낸 방법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의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이다.
용서해 줄 사람이 없는데 계속해서 죄를 갚는 브라이오니의 이야기다.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중심 질문이 바로 "세실리아와 로비가 다시 만나 사랑할 수 있을까?"였던 것을 생각하면 브라이오니의 소설은 훌륭하게 성공한 게 아닐까. 사실 관객들은 로비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죽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로비가 갑자기 세실리아의 집에 멀끔한 얼굴로 나타나 화를 낸다니. 말도 안 된다. 우리는 이게 꿈과 같은 신기루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소설이라고 밝혀지고 나서도 놀랍지 않았다. 역시 그랬구나. 진실을 안 내 마음에 떠오른 첫 문장은 저것이었다. 이야기가 그렇게 쉬울 수는 없는 것이다. 속죄가 그렇듯이.
브라이오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듯하다. TV 쇼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할 정도의 작가인 걸 보면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속죄>라는 소설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임을 밝히고, 이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실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았다.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부분은 각색했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이제 완벽한 작가다. 각색한 부분이 회피나 나약함이 아닌 친절이라고 말하는 브라이오니의 눈은 떨리고 있지만 또렷하다. 실제로 각색된 부분에 회피나 나약함은 없다. 브라이오니는 스스로의 잘못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소설 속 로비와 세실리아의 입을 빌려 충분히 비난했다. 이후 로비와 세실리아를 이야기 속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은, 그들에게 한 번도 친절을 베푼 적 없었던 어린 시절의 브라이오니를 벗어나 성장한 브라이오니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친절, 그리고 속죄일 수 있다.
더러는 브라이오니가 죽었어야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브라이오니가 죄책감에 죽었다면 그것이야말로 회피이고 나약함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괴롭다. 브라이오니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전적인 소설을 쓰며 그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곱씹었다. 가시적인 신체의 고통만이 고통은 아니다. TV쇼의 인터뷰에 응하는 브라이오니의 입술은 심적인 고통 때문에 쉼 없이 떨리고 있다. 반 세기 이상 스스로를 비난하기 위해 적어 내린 소설을 온 세상에 내보내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독자의 시선이라는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속죄의 완성은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