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전교조였다. 17살 청소년들도 알 건 알았다. 학교와 많이 싸우겠구나, 이상한 사상을 주입하겠구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겠구나. 세계사 수업이 재미있어도, 학생의 얘기를 들어줘도 그녀 편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낙인은 소통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어쩌면 같은 모습이 보인 그였기 때문에 내가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도 거친 세상에 겨우겨우 맞서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나는 또래와 거리를 두며 지냈다. 노력했지만, 날 것 그대로의 모습과 행동은 나를 힘들게 했다. 누군가는 이 시절이 전성기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러지 못했다. 소위 말해 ‘찐따’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각자 만의 무리를 구성하며 시비 거는 이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작아 보이지만 거대한 구조악에서 나는 묵묵히 속을 삭였다. 말해도 변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말 못 할 고민을 담임 선생님도 아닌 그녀가 들어줬다. 답은 간단했다. 외부에 휘둘리지 말고 학생의 본분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뭔가 마음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걸 인정하고 학교생활을 하니 다녀 볼 만해졌다. 그렇게 내 귀인은 내일을 걸을 수 있게 등불을 들어주었다.
오랫동안 그녀와 상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을 함께하게 되었다. 학생인권조례 청문회에 참가하고,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러 가고, 전통학교 시험 준비도 같이했었다. 빛나는 시간도 있었지만,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의미 있기에 계속해서 도전했다. 그녀를 통해 나는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수능 두 주일 전, 나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꾸준히 내가 했던 걸 유지했고, 면접 준비도 열심히 했던 결과였다. 결과를 보고 바로 나는 그녀에게 갔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축하해! OO아. 네가 열심히 한 덕분이야.”
더 많은 표현을 못했지만 고마운 마음을 연신 내비쳤다. 심리적 몰락 속에서 나를 건진 귀인. 그녀의 외적인 건 내겐 중요치 않았다. 속셈 없이 간절하게 생을 살게끔 해준 목자였던 그녀에게 감사했다. 졸업 이후에도 스승의 날마다 그녀를 찾아뵙는 건 나만의 습관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열심히 삶을 살고 있다. 여성 인권을 위해 분주하게 뛰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낀다. 내 귀인은 여전히 외롭게 홀로 선 목숨을 위해 등불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목숨이었고, 그녀를 통해 구원받았다. 이제는 나도 웅크려 울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귀인이 되고자 한다. 19살, 모닥불처럼 사위어 갔던 삶에 온기를 내준 그녀를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