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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지 Aug 13. 2024

[엄마의 일기장] 일곱 살의 너와 아홉 살의 내가 만나

"엄마,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아침이야? 새벽은 정확히 몇 시야? 12시 59분이면 새벽이야?"

"응. 12시 59분이면 새벽이지."

"그럼 밤 12시는? 그 시간도 새벽이야?"

"밤 12시는 '자정'이라고 해. 점심시간 12시는 '정오'라고 하구."

"12시가 자정이야? 그럼 11시는?"

"음. 11시는 따로 정해진 이름은 없어. 오전 11시라고 하면 돼. 12시만 따로 자정, 정오라는 이름이 있어."

 

"엄마, 내가 태어난 2018년은 ‘옛날’ 이야? 현재는 지금이야? 그럼 방금 전은?"

“응, 이든아 현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동안 바로 지금이 지나갔지? 이든이가 과거, 현재, 미래를 물어보던 때가 어느새 과거가 되었어. 지금 엄마가 말하는 시간도 계속 지나가며 과거가 되고 있지. 그래서 오늘 바로 지금은 소중한 거야. 아주 귀한 거야. 그래서 영어로 present가 바로... (이쯤부터 아이의 집중력이 흐려진다.)"


“엄마, 이 책 보면 ‘미래 자동차’ 챕터에 전기차가 있는데 전기차는 지금 볼 수 있잖어. 그런데 왜 ‘미래 자동차’야?”

“응, 이든아 보니깐 이 책을 작가가 썼을 그 시기에는 아직 전기차가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때는 ‘미래 자동차’였는데, 이제는 그럼 ‘현재 자동차’ 해도 되겠다.”


“엄마, 그런데 땅을 계속 파서 내려가면 어떻게 돼? 지구가 반으로 잘라질 수 있어? 바다 아래는 뭐가 있어?”

“응, 바다 아래는 산이 있기도 해. 화산도 있고.”

“그럼, 그 산을 계속 파면 뭐가 나와? 라바가 나와? 그다음은 뭐야?”

“뭐? 라바? 푸하하. 그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캐릭터 말이야?”

“아니, 그 라바 말구우.”

“아. 그 라바? (대충 정황상 아는 척을 해야겠다.) 어쨌든 말이야. 너무 뜨거워서 핵은 못 파. 아주 뜨겁거든.”

“그럼, 그 핵은 몇 도야?”

 

“엄마, 우리나라 반대편 저 끝에는 무슨 나라가 있어?”

“아, 지구 반대편 나라? (음. 아프리카인가? 찾아보니 우루과이였기에 다음날에 알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조우하는 아이의 물음표를 듣는 일은 설렘과 긴장을 준다. 조그마한 아이가 언제 커서 엄마랑 대화라는 걸 해보나 했더니 어느덧 피어나는 생각들과 함께 질문 보따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중 어젯밤 심장을 쿵 하게 만든 질문을 만났는데 바로, 땅을 계속 파면 어떻게 되느냐는 위의 물음 중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여러 날 궁금한 마음을 안고 선생님께 다가가 여쭈어보았던 질문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있잖아요. 저기 운동장에 포클레인이 계속 땅을 파고 있잖아요? 그런데 땅을 파고 또 파고 계속 파면 어떻게 돼요? 혹시 지구 반대편 나라가 나오나요? 그런데 왜 아직 아무도 땅을 끝까지 파지 못했나요?”


“선생님, 저 그런데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큰 돌멩이랑 작은 돌멩이를 똑같이 떨어뜨렸는데 어떻게 떨어지는 속도가 같은가요? 아주 크고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몇 번이나 해봤는데 똑같이 땅에 떨어지더라고요.”


그날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선생님께서 함께 운동장으로 나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흙으로 가득한 운동장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화단에서 가져오신 두 개의 크고 작은 돌멩이를 들고 계신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떨어지는가 봐야지!’  


나의 지식이 얕은 탓에 선생님의 말씀을 100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아이가 물어보는 말에 속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분명 땅을 끝까지 파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엄마의 답변이 한참 부족했던 것 같은데... 아이의 질문에 대해 중얼중얼 답을 해주고 나니, 이든이가 잠들기 전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오잉?' 왠지 흡족하고 기분 좋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덧 몸집이 꽤 자란 아이의 품에 누우며 함께 꼬옥 안아주는데 구름 속에 몽실몽실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금세 둘째가 침대로 올라와 셋이서 까르르 레슬링 시간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 시간의 나는 마치, 내 안에 잠들어있던 어린 소녀의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질문하기도, 대화 나누기도 쑥스러운 그런 생각들을 아직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치 반가운 대화 친구를 만난 듯했다. 얼마 전 아이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붉어진 눈시울로 지금 저 별은 과거의 별일까, 빛으로 도착한 지금의 별은 아직도 살아있을까 요리조리 생각해보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잠든 뒤 문득, 아홉 살 시절의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그 시간이 아직도 생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께서 다소 황당하실 수도 있는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시고 함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답을 찾아가며 설명해 주셨던 그 모습에, 아마도 나는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담 혹시 이든이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답변은 참 횡설수설 시원찮았을지언정 뒹굴뒹굴 고민하며 답을 들려주려던 모습에 소통을 느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우리 얼른 이야기 좀 하자. 오늘은 무슨 이야기할까?"


불을 끄고 누우면 아이들과 기도를 하고 자동차 경주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들려주는 스토리에 글감이 안 떠오를 땐 이런저런 하루의 이야기를 방귀와 똥을 등장시키며 우스꽝스럽게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든이와 깔깔대다 보면 잠들어 있는 둘째 이안이. 그리고 꼭 껴안아준 뒤 잠드는 첫째 이든이. 얼마 전 강원도 정선의 밤 마주했던 수많은 별들이 떠올랐다. 일곱 살의 아이와 아홉 살의 엄마가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별꾸러미가 되어 저하늘의 은하수를 수놓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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