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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 Apr 25. 2022

마음이란 옷장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말이다.

어느덧 제주에서 1년이 훌쩍 넘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익숙했던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설레는 휴가처럼 되었으니, 이젠 제법 제주도민이 된 것이다.


가끔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난 꼭 옥수동 친구들에게도 가기 전에 연락을 남긴다.

"이번에 서울 가는데, 시간 되면 볼래?"

6명이 있는 톡방에 어느 순간 보면 숫자는 사라진 상태이지만, 톡방에 올라오는 친구의 이름은 보통 정해져 있다.

대화는 간결했다.

"난 시간 괜찮아."

"아 난 그날은 좀 애매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서울 가서 연락해볼게. 시간 되면 보자고."


난 이제 택시처럼 편하게 비행기를 탈 정도로 제주와 서울을 제법 왔다 갔지만, 옥수동을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뿐이다.

본가도 이사를 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을 보낸 옥수동을 갈 일은 친구들을 만날 일 말곤 없다.

그러니까 난 오랜 동네 친구들을 1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딱 한 번 만난 것이다.


우린 특별할 것 없는 말 그대로 동네 친구들이었다.

학창 시절 같이 학교에 다니고, 함께 이십 대를 보냈던 친구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린 이유 없이도 잘 모였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어도,

누군가 밤늦게 불러내도,

나가서 잠도 안 자냐며 욕을 한 사발 할지언정 우린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럴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우린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그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어느새 사회의 무게를 조금씩은 알아가고, 배워가는 30대 청년들이 되어버렸다.


역시나 힘들 것 같다는 한 친구의 연락에 쉽게 약속을 기약 없이 뒤로 미뤘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지 뭐."

예전엔 이 말이 참 어려웠는데, 이젠 약속이 일그러져도 감정의 동요는 없다.

나조차도 내가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 줄도 역시 몰랐다.


아마 지금도 만나기만 한다면, 예전처럼 재밌을 걸 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같이하며, 또 이십 대를 함께 보내며 쌓은 추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이젠 그 추억을 함께 나누기 위해 모이기조차 어려운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나이가 변한 건지, 아니면 마음이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옷장엔 오랜 시간 입진 않았지만, 버리지 않고 옷걸이에 걸어둔 맨투맨 티가 있다.

항상 옷장을 열면 보이기에 눈길은 주었지만, 손길은 주지 않았던 그런 옷이다.

어느 날 한 번 생각 없이 꺼내보았다.

너무 오랜 시간 걸어두어서 어깨 쪽에 옷걸이 모양으로 이상한 굴곡이 생겨 변형되어 있었다.

색도 예전에 비해 바래진 것만 같았다.

내가 슬펐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저 잠시 버릴까 하다가 이내 한 번 털어서 다시 걸어둘 뿐이었다.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도 그렇게 시간 속에서 이미 조금씩 변해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변해버린 관계를 정리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정리되거나,

혹은 예전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될 테니 말이다.


시간에 따라 우리의 많은 것이 변하듯이, 관계도 당연히 변한다.

우린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섭섭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그 과정 속에 후회라는 것이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음 속이란 옷장 속에도 여러 가지 인연과 추억의 옷들이 걸려있을 것이다.

굳이 시간 내고, 마음을 써서 그 옷장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입을 옷을 내가 알아서 꺼내 입듯이,

소중한 사람에겐 내가 알아서 마음을 꺼내어 쓰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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