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건넨 친절에,
당신이 짓는 미소에,
당신과 내가 주고받는 눈빛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 됩니다.
무신론자인 내게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말한다.
“때가 되면 하느님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러면 나는 “그렇구나” 한다. 난 신을 부정하기에 무신론자가 아니라 아직 신을 만나지 못해 무신론자인 사람이라 생각한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걸 내가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없다고 단정 짓기도, 그렇다고 덜컥 믿기도 어려운 난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한 번씩 ‘진짜 신은 존재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중 가장 강하게 느꼈던, 바야흐로 옛날 옛적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홀로 무릉계곡을 찾은 날이었다. 숙소를 나와 버스를 타고 무릉계곡에 도착한 이른 아침. 맑은 공기와 깊은 계곡의 골짜기,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시원한 물줄기는 그야말로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정말 신선이라도 된 들뜬 기분과 군인의 무대포 패기의 결합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함에 이르렀다.
“이 정도 산은 공복에 가뿐히 오르는 조깅 정도에 불과하지. 훗!”
산을 타고 내려와 절에서 점심 공양이나 받을 요량으로 아침은 호기롭게 패스! 하지만 삼시세끼에 맞춰진 군인의 바이오리듬은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영양소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 허기짐의 상승과 체력 저하는 급속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을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갈 위기에 처했고, 이런 절경을 놔두고 배고픔 때문에 되돌아가는 허망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눈앞의 계단만 올랐다가 되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한 계단 한 계단 인내의 발걸음으로 마침내 계단 정상에 올랐을 때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아주머니께서 홍시 반을 가르며 내게 건넸다.
“자, 이건 네 거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건넨 홍시 반쪽. 평소 같았으면 한국인의 미덕을 보이며 과한 표정과 손사래로 거절하다 서너 번의 실갱이 끝에 겨우 받았을 것을 단박에 넙죽 받았다. 나 역시 그 반쪽짜리 홍시가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반쪽짜리 홍시의 힘으로 나는 산행을 더 이어갈 수 있었고 이는 정확하게 내가 필요한 열량만큼만 보태주었다. 정말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완벽하게 적당했던 양. 이후 계획대로 점심시간에 맞춰 절에 도착해 공양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 맛 역시 일품이었다. 이 역시도 정확했던 홍시의 양 덕이었다.
배가 부르고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바위에 걸터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묘하게 느껴졌다. 어찌 그런 이른 시간에 나를 기다린 듯 떡하니 있었을까? 그것도 마치 내게 홍시를 주기 위해서 기다렸던 것처럼. 단지 멀대같은 사내놈이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곧 죽을 기력으로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는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에 홍시를 반 갈라 주었을 수도 있지만 ‘신’의 존재가 떠오를 만큼 강렬했던 아주머니였다.
과연 신은 존재 하는가?
만약 신을 평생 만나지 못한다한들 인간인 우리들 서로가 서로에게 홍시 반쪽을 나눠줄 수 있는 신적인 존재가 되어줌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