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이 나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같은 팀 후배가 입사한 지 2년 정도 되자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고 우울해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계속해서 똑같은 방향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한탄하면서, 일을 하며 창의성도 발휘 안되고 재미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매너리즘이고, 후배가 매너리즘에 빠진 걸 축하해줬다. 후배는 내가 본인을 놀리는 줄 알고 한숨을 푹 쉬었지만 나는 매너리즘에 빠진 후배의 상태를 이렇게 진단해주었다.
1. 너는 정답을 알고 있다
- 회사는 예술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창의적인 직군에 있는 사람들도 보고와 결재를 통해 업무를 마무리한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가 원하는 '최종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이미지를 캐치하지 못해서 몇 번이고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데 무리 없이 진행된다면 해당 조직이 업무에서 원하는 '정답'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고로 2년 간의 시간 동안 빠르게 정답을 캐치한 후배의 일머리를 인정해주고 싶었다.
2. 업무 Process 최적화가 완료되었다
- 추가적인 고민 없이 일이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어찌 되었건 최소한의 노력으로 맡은 일이 처리되도록 Process 최적화를 시켜놨다는 뜻이다. 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잡한 일을 단순화하고 프로세스화 해서 전체적은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프로세스가 완성되면 이전보다 input이 줄어들게 되며 내가 열정을 가지고 일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하자. 회사는 너의 열정보다 결과물에 더 관심을 둔다.
3. 가장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지킬 수 있다
- 연애를 하며 365일 내내 불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맡은 일도 처음에는 신입사원의 열정과 패기로 최선을 다해 수행하지만, 언제까지 100% 에너지를 써가며 일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신입사원을 못 봤다. 적어도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진 사원들에게 매너리즘이 생기지 않는가. 돈을 받고 일하면 모두가 프로다. 프로는 힘을 뺄 때와 힘을 줄 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애정 하는 MoTV에, TBWA 유병욱 CD가 나와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리더라면 '식판의 일과 평판의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식판의 일은 밥벌이를 위한 일이고 평판의 일은 우리의 명성과 관련된 일이다. 리더는 이를 구분해서 식판의 일은 어느 정도 수준만 충족하면 만족해서 구성원들의 에너지를 관리하고, 평판의 일은 구성원들과 함께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할 수 있은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영상 링크 : https://youtu.be/cLiDq1z0XSU)
리더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도 본인이 판단하기에 '식판'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남겨두면서 업무를 처리하고 '평판'의 일이라면 전력투구하는 전략을 가지고 회사생활에 임하는 게 현명하다. 고로 '식판'의 일에 매너리즘이 생긴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4. 이제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할 수 있다.
- 정말 너무 바빠서 모두가 힘들겠다고 인정하는 부서의 사람들은 이직을 잘 못한다. 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바로 눕기 때문에 다른 뭔가를 준비할 에너지가 없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바쁜 부서의 사람들은 퇴근 후에 시간이 있기 때문에 잘 준비해서 이직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어 여유가 생겼고 진지하게 커리어를 고민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면 좋다. 회사 내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이직을 해야 할지 등 정보를 모으는 시기라고 생각해도 좋다. 우선, 내가 맡았던 일들의 궤적을 정리해보고 관심 있는 채용공고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것들을 요구하는지 보면 채워나가야 하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팀 내에서 다른 Job을 맡아보고 싶은지, 자격증이 필요한지, 이직을 위해 여러 회사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볼 건지 고민해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의 가치관이 워라밸을 달성해 사외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라면 칼퇴를 하며 자기 계발이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앞으로 1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할 예정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김'에 커리어를 한번 정리하는 분기점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니, 매너리즘에 빠져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축하한다.
그동안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이니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