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물젤리 Aug 02. 2023

 별거 아니지 않지만 해볼 만한 여름 방학

여섯 살 미남이

여름 방학이다.

나와 미남이 엄마 아빠가 하루씩 휴가를 내서 가정 보육에 들어갔다.


첫날, 주차장으로 녀석을 마중 갔다.

자동차 뒷 트렁크에는 노란색 킥보드 조수석에는 물건이 가득한 종이가방 한 개가 얌전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진 종이가방은  나 몰라라 버리고 킥보드만 챙겨서  슝~~ 달려 엘리베이터를 탄다.


신고 온 크록스를 내팽개치듯 벗어던지더니  내가 들고 온

종이가방을 가져다 거실바닥에 와르르 붓는다.

숫자공부, 선잇기, 틀린 그림 찾기 책들이  쏟아지고 마이쮸랑 건빵 봉지도 나뒹군다.


낑낑 마이쮸를 뜯더니 일단 한 개 먹어보겠단다.

그리고 건빵봉지를 열어 건빵 한 개를 먹던 미남이가

토마토 주스에 찍어먹겠다며 주스를 만들어 달란다.

내가 비스킷을 커피에 찍어먹는걸 세 살부터 봤던 아이다.

그때부터 난 커피에 미남이는 토마토 주스에 비스킷을  사이좋게 찍어 먹는 다도 문화를 즐겨왔다.


오늘 우리 시간은 남고 넘친다.

즐겁게 시간을 보낼 뭔가라도 있다면 꼭 붙들어야 하루가 쉽다.

아가 때 싱크대에서 보내는 일을 취미로 하던 아이다.

"미남이가 주스 만드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오랜만에 주방으로 이끌었다.


칼로 씻은 토마토를 토막 내고 껍질 벗긴 사과도 잘게 썬다.

서툰 칼솜씨에 적당히 시간이 잡아먹힌다.

손질한 과일을 믹서기 안에 한 조각 한 조각 담는 일도

주스 담을 컵을 고르는 일도 서두를 이유가 없다.

"조심조심 천천히 해도 돼"

조심성 많은 아이라 신중하고 느리다.


잘 갈아진 주스와 따끈한 커피에 건빵 한 접시도 식탁에 올린다.

"으음~~~ 맛있어"

빨간 주스 찌꺼기  묻은 입꼬리가 귀엽다.


차를 마셨으니 시간 죽이기 신공으로 떠오른 콩나물 다듬기다.

하나하나 살피며 까만색 콩나물 머리 찾기에 온 집중력을

쏟는다.

그동안 집중력에 문제가 있다고 흉봤던 일이 무색하다.

그리고 내가 콩나물에게 고마워할 줄 몰랐다.

까만색 새치머리 콩나물님들 특히 고맙다.



티브이에서 보던 극한직업이 싫증날즈음

숫자 순서에 따라 선을 이어  그림을 완성하는 잇기 책을

펼친다.

미간을 모아야 겨우 보일랑  말랑 백까지 늘어져 있는 까마득한 작은 숫자들에 눈이 어지럽다.


좋아하는 초록색 팬을 먼저 골라잡은 녀석은 인심 쓰듯 할머

니 좋아하는 색깔을 고르란다.

책을 잠시 보더니 숫자가  너무 많다면서 나에게 50까지 먼저 그리라며 내쪽으로 밀었다.

10까지 그리고 나니  눈이 피곤해졌다.

"할머니가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는데 우리 10씩 하는 게 어때?"

"침침한 게 뭔데요?

"응, 늙으면 작은 게 잘 안 보이고 눈이 막 피곤한 게 침침한 거야"

팬을 들고 11부터 14까지 겨우 그리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할머니, 저도 늙어서 눈이 침침하고 잘 안 보여서 못하겠어요"

글자 따라 읽을 땐 입 아프다는 핑계로 한글공부를 거부하던  녀석은 지병으로 이제 노안까지 얻었으니 이래저래 공부랑은 만나자 바로 이별하게 생겼다.


 그리던 팬을 내팽개치고 장난감이 있는 팬트리를 열었다.

블록통, 자동차 박스, 장난감 상자를 죄다 꺼내더니

식탁의자에 걸쳐둔 마르지 않은 이불을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자동차가 이불 위에 어지럽게 엉켜있다.



주차장 출구가 막혀 차가 못빠져 나가고 있다며 나더러 주차 관리요원을 하고 모두 몇 인지 세서 숫자를 말해달라고 했다.

"미남이도 셀 수 있잖아. 직접 세어 보는 건 어때?"

"난 눈이 침침하다고요오"

아이고.

그정도 노안이시면 우리 어르신 소파에 가만 누워계셔야죠.


무슨 일로 배가 프다고 했다.

반가운 일이다.


준비해 둔 불고기를 볶고 계란 프라이랑 콩나물 반찬을 꺼내

고 녀석이 좋아하는 물김치도 작은 그릇에 덜어냈다.

수저를 챙기고 밥솥을 여는데

"할머니, 뷔페로 차려 주세요"

"어떻게?"

"물김치는 다시 통에 담고 고기도 프라이팬에 다시 넣어서

통째로 식탁에 많이 올려주세요. 그럼 미남이가 집개로 집어서 먹을 거예요"

네네.

시간 많으니까요. 뭐라도 해 봅시다.


뭐든 많이 꺼내 식탁을  채우라니  먹지도 않을 김치통에 녀석이 제일 싫어하는 버섯볶음도  그릇째 가지런히 올렸다.


"뷔페는 얼마예요?"

"네 오만원입니다 손님"


미남이는 지폐 쏘는 장난감 총에서 오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탁 얹었다.

이것저것 요구가 많았으니 공짜밥은 저도 염치가 없었을 테다.

오늘은 왜 오만 원이냐고 따져 묻길래 원래 오만 원이라고 했다.

"왜 원래 오만 원인데요?"

"원래 정해진 가격입니다 손님"

"주유소 주유할 때는 가격이 달라지는데 왜 여기는 맨날

똑같아요?"

휴~~~

"손님? 음식 가격은 주인 맘입니다. 안 드실 거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아, 그렇구나아~~"

재빠르게 꼬리를 내린다.


집게를 잡고 서툴게 접시에 담은 반찬은 달랑 세 가지.

그까짓 거 먹을 거면서 죄다 꺼내라고 했냐?

그래도 밥 달라고 먼저 얘기한 게 어디며 흡족할 만큼 어주시니 그 뿌듯함 만으로도  뒷정리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잘 먹고 의자에서 내려오면서 하신 말씀이다.

"할머니 뷔페에 왜 과일 화채가 없어요? 다음에는 꼭 화채도

만들어 주세요. 알겠죠?"


한창 뒷정리 중인데 날 불러서 뭐라고 계속 묻는데 잘 알아듣

지를 못했다.

"미남아 미안해 할머니가 못 알아 들었어"

"아니이, 그렇게 미안해할 것까지는 아닌데요오"

아 네.

미안해해서 미안하게 됐네요.


녀석은 이 더위에도 시소 타자 같이 그네 타자

나까지 끌어들여 두 군데 놀이터를 돌며 야무지고 놀았다.

그리고 퇴근한 엄마가 올 때까지 킥보드를 신나게 탄 뒤 저녁까지 잘 얻어 먹고 한참을 더  놀다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순번 때는 햇빛 쨍쨍한 놀이터 대신 욕조다.

욕조 가득 물을  채워서 장난감 물고기를 둥둥 띄우고 자석 낚싯대를 녀석 손에 쥐어 줘야겠다.

나는 욕조에 걸터 앉아 잡은 물고기에 소금  칙칙 뿌려 굽고 고춧가루 소금 알맞게 넣어서 알싸한 매운탕도 끓여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뷔페는 없다.

과일 화채까지는 너무 하다.

대신 콩나물은 넉넉하게 준비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참 다행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