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라토너 거북 맘 Jul 14. 2024

엄마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면...

점점 작아지는 울 엄마를 보며

"아니, 엄마! 내가 눈 오고 길 미끄러운 날에는 지팡이 짚으시라고 말씀드렸잖아!"

"엄만 절대 넘어지면 안 되는 거 모르셔? 아 왜 말을 안 들으셔!"


걱정되는 마음을 넘어, 속상하고 화가 나는 마음에 전화기에 대고 엄마에게 다다다 퍼붓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에 화가 나 있는 것일까.

한쪽 다리에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신 이후로 걸음걸이도 예전 같지 않고, 자칫 잘못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큰 일 치르니까 항상 조심 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기어이 빙판길에서 넘어 지신 엄마에게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올해로 여든이 된 노인네 곁에서 이것저것 돌봐드리고 신경 써 드려야 하는데 물 건너 해외에 사느라 그러지 못하는 내 상황에 화가 난 것일까.


지난겨울, 엄마가 눈 길에서 넘어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있었다.

'애들 여름방학 때 같이 한국에 나가게 되면, 가장 먼저 지팡이부터 사 드려야지.'

사실, 지팡이 얘기는 진작부터 나왔었고 다리 수술을 받으신 이후로 꾸준히 엄마에게 권해왔었다.

하지만, 왕년에 킬힐을 신고 명동을 누비며 다니시던 때를 자랑스러워하시는 우리 김여사께서는, 당신이 꼬부랑 할머니 마냥 지팡이에 의존해서 다니셔야 한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자존심 상해하시고 극구 거부하셨다.


"아니, 엄마... 누가 일 년 365일 지팡이를 짚으시래? 그냥 눈 오고 길 미끄러운 겨울에만, 밖에 나다니실 때 이용하시면 훨씬 안전하고 도움이 된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여사는 겨울용 아이젠 신발을 신으면 된다며 고집을 꺾지 않으셨었다.


"엄마, 큰 딸내미 아주 튼튼하니까 내 팔에 몸 기대고 체중 실으셔도 돼. 조심하시고, 천천히 한발 한발..."


6월 초, 김여사의 팔순을 맞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힘들기로 악명 높은 유럽이지만, 크루즈 여행은 그나마 노인들에겐 체력 소모가 심하지 않은 선택이라, 김여사도 지중해 크루즈를 이용해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크루즈에 탑승한 승객의 반 이상이 노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배 안에는 온통 은회색의 머리를 한 유럽 각국의 노인들이 북적거렸고, 그중에는 휠체어나 타인의 부축이 없으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꽤 있었다.

혹자들은, '아니, 그 몸을 해갖고 뭘 굳이 저렇게 악착같이 여행을 다닌다고 돌아다닐까... 저 몸으로 뭐 제대로 구경이나 하고 즐기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늙지 않을 것 같냐고, 평생 건강하고 팔팔할 것 같냐고, 몸이 늙고 부실해졌다고 보고 느끼는 것도 못 할 것 같으냐고...


아무튼 우리 김여사는, 행여 자식들한테 민폐라도 될까 싶어서 다소 힘든 일정에도 전혀 피곤해하는 기색 없이 열심히 쫓아오고 따라다니셨다.

그중, 로마에서의 일정이 가장 힘들었는데, 몇 가지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눈에 보이고 발에 닿는 모든 것들이 유적지인 로마의 특성상, 길바닥도 오랜 역사가 스며있는 울퉁불퉁하고 험한 자갈 모양의 돌길들이 많아, 다리가 불편한 김여사는 자칫 발이라도 헛디뎌 넘어질까 봐 긴장하며 연신 바닥을 보며 가야 했던 상황이 많았다.

게다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해, 사람에 떠밀려서 길을 걸어야 했던 탓에, 결국 김여사는 내 손을 꼭 잡거나 팔에 의지해서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히 고단하고 힘든 코스였지만, 난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기가 엄마 손에 의지하며 조심스레 발을 떼듯, 당신의 체중을 내 팔에 실어 기대고 이제는 주름지고 앙상해진 손으로 내 손을 꼭 잡던 그 느낌과 온기를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 같다.

'나도 엄마 손을 잡고 저렇게 걸음마를 배웠을 테지.... 이젠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걸음마를 하시네...'

여행 내내, 순간순간 엄마 손을 꼭 잡거나 팔을 빌려드리고 부축을 했던 그 시간들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싶지만...

실제로, 나에겐 그 시간들이 가장 소중하고 따뜻했다.


"생각보다 가볍고 좋아 보이네, 높이도 이 정도가 딱 알맞은 것 같다."


일요일 오전, 나와 아이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김여사가 놀러 오셨다. 주말엔 딱히 김여사를 챙기거나 연락하는 사람이 없어서 늘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은데, 내가 한국에 와 있는 기간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매주 김여사와 오붓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미리 주문해서 받아 놓은 지팡이를 보신 김여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날렵하고 세련돼 보이는 지팡이의 자태에 만족하신 듯했고, 직접 지팡이를 짚고 왔다 갔다 해 보시더니 가볍고 괜찮다고 하셨다.

"아직까지는 엄마가 수술하신 것 치고는 잘 걸으시니까 평소엔 지팡이 안 짚으셔도 되지만... 눈 오고 길 미끄러운 겨울에는 꼭 지팡이 갖고 다니시라고요, 네? 제발 딸 말 좀 들으시라고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귀여운 김여사와 함께, 초복을 하루 앞둔 오늘 점심으로 삼계탕을 먹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식사 후, 차와 디저트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쇼핑을 한 후 지하철 역에서 김여사와 헤어져야 했다.

"엄마! 계단 조심하시고, 천천히 내려가셔! 들어가서 전화하시고!"


계단 난간을 붙잡고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려가는 김여사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니, 울 엄마, 왜 저렇게 작고 말라 보이냐... 어깨는 또 왜 저렇게 앞으로 굽으셨어...'

겨울에만 쓰는 지팡이 말고, 엄마가 걸으실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쭉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지팡이... 내가 그런 지팡이가 되어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정말, 그런 지팡이가 되어 드릴 수 있다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머릿속의 지우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