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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Nov 04. 2024

김여사의 춤바람

수상한 김여사

어차피 땀 흘릴 거라 대충만 찍어 발랐다는 김여사의 꾸민 듯 안 꾸민듯한 화장.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패션쇼 할 것도 아니라서 대강만 걸치고 나왔다는,

무심한 듯 신경 쓴 듯 묘한 세련미를 풍기는 방년 80세 김여사의 패션.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지, 무척이나 바쁜 듯 잰걸음으로 총총히 앞서가는 김여사.

도대체 어딜 가는 걸까. 뭐 하러 가는 걸까.


허름하지만 제법 규모 있어 보이는 건물의 지하로 내려간 김여사는

이미 그곳의 단골인 듯, 입구에서부터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익숙하게 들어선다.

잠시 숨을 고르고 소지품을 맡긴 김여사는, 늘 그래왔던 듯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어두운 지하 공간이었지만, 화려하게 번쩍이는 천정의 조명들과 휘황찬란하게 돌아가는 미러 볼,

실내 구석진 곳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악 소리로 인해,

오히려 한낮의 해가 내리쬐는 바깥 보다 더 밝고 눈부신 세상인 듯 느껴진다.


김여사를 먼저 발견한 한 남성이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저쪽에서 다가온다.

꽁지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 넘긴 깡마른 체구의 남성은 김여사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민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김여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우아한 듯 새침한듯한 표정으로 남성의 손을 가볍게 잡는다.

드디어 그들만의 작은 무도회가 시작됐다.

아래위로 검은 의상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성이 노련하게 김여사를 리드하기 시작한다.

능숙한 길잡이처럼, 남성은 김여사의 스텝을 체크하며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선율 속으로 김여사를 안내한다.


약 한 시간 동안, 김여사와 남성은 수면 위를 떠다니는 백조들처럼, 미끄러지듯 스테이지 위를 누빈다.

얼마였는지 셀 수 조차 없을 만큼 무수한 턴을 하고, 족히 만보 이상은 되고도 남을 만큼의 스텝을 밟으며,

김여사는 대형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서늘한 실내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열정적인 무대를 선 보인다.

저 모습이 정말 80세 할머니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제 충분히 쇼를 보여줬다고 생각한 김여사는 공손하게 남성과 인사를 나누며 마무리한다.

그리고 구석에서 열심히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있던 방년 51세의 큰 딸을 손짓으로 부르며 활짝 웃어 보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예전보다 훨씬 더 활력 있고 밝아지신 것 같아요. 선생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며 마음을 담은 선물을 건네는 김여사의 큰 딸내미에게, 꽁지머리의 남성은 손사래를 치며 민망해한다. 하지만 줘서 싫다는 사람이 있을까.


"저희 어머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해외에 사느라 김여사를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대신하려는 듯,

큰 딸내미는 연신 무도장의 관리인들이나 춤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부탁을 하며 소소한 선물도 건네본다.



노래 부르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아 노래방을 가는 일도 없으며

또래 할매들의 심심풀이 게임인 화투도 싫어하는 김여사.

그렇다고 노인정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체질에 안 맞아하는, 내성적인 김여사의 유일한 취미는 의외로 '춤'이다.

오래전, 큰맘 먹고 돈 들여 정식으로 사교댄스를 배우기까지 했던 김여사.

발톱에 피멍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배웠었단다.

그에 비해, '춤알못' 정도가 아니라 '저주받은 몸뚱이'인가 싶을 정도로 춤과는 거리가 먼 나는 그런 김여사가 신기하기만 했다.


10년 전쯤, 오른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한 이후로 걸음걸이도 어색해지고 예전처럼 움직이기도 불편해진 김여사.

가파른 지하철 계단이라도 내려갈 때면, 난간을 붙잡고 한 칸 한 칸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김여사.

그럴수록 더 걷고 움직이며 운동해야 한다고 매일같이 해외에서 전화로 잔소리를 해대는 큰 딸년 때문에,

마지못해 운동 삼아 다시 시작해 보기로 하신 김여사의 댄스.

한 마디로 김여사에게 무도장은 헬스장이나 마찬가지고, 춤 선생님은 트레이너와 같은 것이다.

때로는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는 열정까지 보이며, 매주 한두 번씩 무도장을 들락거리던 김여사는,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체력도 점점 좋아져서 이제는 춤 선생들한테 칭찬도 받고 인정받는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한 시간 정도 미친 듯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나면, 비 오듯 땀이 나면서 우울했던 마음도 좋아진다며 눈을 반짝이며 춤의 장점들을 늘어놓는 김여사.

춤출 때만큼은 잡념이 사라지고 다리의 통증도 못 느낀다는 김여사.

그런 김여사가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한 큰 딸.

그래서 큰 딸내미는 여름휴가를 맞아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에, 김여사의 춤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비디오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울 엄마, 참 멋지다... 진짜 예쁘다... 저 나이에 저렇게 멋질 일이냐고...'


춤추는 김여사의 모습을 촬영하는 동안, 큰 딸내미는 남몰래 울컥하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도 지으며 행복한 추억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공들여 촬영하고 만든 김여사의 댄스 비디오를 보며, 진심으로 신께 기도하고 소원했단다.

김여사가 언제까지나 저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물 수 있기를...

80세가 아니라, 나중에 9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댄싱퀸 김여사일 수 있기를...

김여사의 아름다운 춤바람이 영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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