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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너머 Nov 03. 2022

찰나의 소유

영국에서 지낸 것이 어느덧 1년이 넘었다.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고, 논문 준비를 슬슬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영국 체류 기간이 절반도 안 남았다는 생각에 남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해, 특히 여행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여행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비단 가있는 시간만이 아니라, 준비할 시간과 다녀와서 일상 복귀를 위해서 잠시 정리할 시간까지 필요한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활동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여행은커녕 제대로 된 여가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영국에 처음 왔을 때는 이 사치를 마음껏 누리고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즐겁고 사치스러운 여행도 자주 가니, 가장 최근에 갔던 여행에서는 빈 속에 초콜릿 케이크를 밀어 넣는 것처럼 한계효용이 뚝 떨어졌다. 즐기려고 가는 여행의 사전 준비가 점점 일처럼 되는 것도 피곤했고, 체력적으로도 다소 한계가 느껴졌다. 그래서 거의 8~9개월 전부터 버킷리스트에 들어있던 남프랑스 미술여행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10월 말 중간방학(하프텀) 때는 집에 있기로 했다. 


새 학기가 되면서 마주한 또 하나의 변화는, 들고나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짧은 기간 알았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 한 명이 귀국을 했다. 친구가 마음을 듬뿍 담아 남기고 간 물건들 중에는 접이식 등받이 의자(deck chair)가 있었다. 정원에 앉아서 책을 보라는 말과 함께 남겨주었고, 나 역시 그전부터 저런 의자에 앉아서 독서하는 로망이 있었지만 정작 학기가 시작한 후 마음이 바빠서 사용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을이 한창인 10월 말 하프텀을 맞아 정원에 펼쳐보았다. 



그리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펼쳐졌다. 우리 집에 이렇게 뻥 뚫린 하늘이 있는 줄 왜 1년 동안 모르고 살았을까. 아마 그동안 정원에 대한 내 이미지는 '창 밖으로 보면 좋은 곳', '잔디 깎아야 하는데', '나가서 고기도 좀 구워 먹어야 하는데 귀찮네' 뭐 이런 것들 아니었을까. 여행을 가는 대신 정원에 앉아보니 흘러가는 구름도, 나뭇가지를 간질이고 가는 바람도, 우리 집 정원 뒷켠에서 낮잠을 자는 이웃집 고양이도 나와 한 순간을 공유한 후 또 자유롭게 지나갔고, 나 역시 그 순간은 온전히 내가 소유한다는 느낌에 가슴이 충만해졌다. 막상 영국에 와서 영문 책을 완독한 적이 없었는데, 하프텀 기간에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200페이지가 좀 넘는 영문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또다시 스스로를 무언가에 얽매고 또 아등바등 지낼 것 같지만,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내 시간을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충족감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시간을 알게 해준 친구에게도, (본인이 관광을 싫어해서지만) 비 일상이 일상을 잠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 남편에게도 감사하다. 다시금 느끼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포기하기 아까운 것 말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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