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말 Nov 19. 2022

제주는 아직 미지의 세계

 어쨌건 제주다. 가끔 여행 왔을 때마다 돌담과 바다, 하늘, 나무들의 색감과 그 조화가 매력적이라 생각했었다. 현무암의 검은색은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동시에 묵직하고 따뜻한 안정감을 주었다.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바다는 청량했다. 추운 겨울, 찾기도 어렵고 좁고 지붕이 낮은 어느 카레 집에서 밥을 먹다가 제주에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상상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을 내며 끓고 있는 계피차의 온기가 소중하게 느껴졌던 곳이었다. 나도 기회가 있다면 한 1년쯤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여기서 살게 되다니. 내가 여기 오게 된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고, 여행 오고 싶어 하는 그곳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나는 제주를 최대한 빨리, 많이 경험하고 싶었다.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인처럼 제주라는 섬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거의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까웠을 정도로 제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제주 사투리부터 맛집, 숨겨진 풍경들과 수많은 오름들까지. 여행지에서 현지인처럼 다니고 싶은 로망이랄까. 그리고 이왕 여기에 살기로 했으니 내 삶이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으면 했다. 내 의지로 온 곳이니 이방인처럼, 손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숙제하듯 매일매일 제주를 탐색했다. 외출을 하지 않는 건 여행을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만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외출하지 않은 날은 의미 없이 하루를 소진해버린 것 같았다. 아이는 내가 외출하자고 하면 귀찮아했다. 하지만 집에만 있다 보면 아이는 자주 심심해했고 나는 놀아달라는 아이의 끊임없는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실랑이하다 보면 숨이 막혔다. 그래서 아이와 오늘은 어디에 갔다가 밥을 먹고 몇 시쯤 돌아오자고 미리 타협을 해가며 외출을 이어나갔다. 외출을 하면 그래도 좀 나았다. 새로운 볼거리와 장소가 잠시나마 아이의 주의를 끌어 주었고 아이의 신나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루에 한 끼 정도라도 외식을 하니 요리와 설거지가 줄어들어 편했다.


 처음에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제주라서 볼 수 있는 공간이나 풍경을 감탄하며 즐겼다. 길을 가다가 음식점이나 상점을 만나면 유심히 보았다.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인터넷에 검색해가며 거리와 건물들을 눈에 익혀갔다. 어린이 도서관도 찾아가 보고 전시관, 음식점, 카페, 박물관, 놀이터나 공원 등을 자주 방문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제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금의 이 낯선 상황이 조금이나마 덜 힘들 테니까. 그렇게 아이가 이곳에 잘 적응하길 바랬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뭔가 개운치 않은 감정이 순간을 즐기는 것을 방해했다. 아이 앞에서 애써 즐거운 척, 설레는 척을 하려고 해도 웃을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들에도 나는 '즐거워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실제의 감정보다 더 즐겁다고, 여기 온 것이 좋다고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암시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으므로. 나는 내 의지대로 이곳에 오는 것을 선택했고 지금 그와는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 그 전보다는 더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조금 더 내 마음을 살펴볼 여유를 가져도 되었건만 나는 마음의 소리를 억눌렀다. 때로 가만히 쉬고 싶을 때에도 '오늘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 돼'라며 나 자신을 닦달했다.


 내가 그토록 내 마음이 아닌 외부의 무언가를 좇았던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무엇을 잊고 싶어서였을까.


 제주의 겨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했다. 이사온 집은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조금만 보일러를 틀어도 기름이 금방 줄어드는 것이 보여서 마음 놓고 난방을 할 수가 없었다. 바람이 강한 날은 창문이 부서질 것 같이 흔들리고 '휘잉'하는 바람소리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컸다. 남쪽이라 기온이 높으니 덜 추울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제주는 사시사철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실제 온도보다 체감 온도가 훨씬 낮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 생각보다 드물다는 것도 여기에 와서 알았다. 그래서 겨울에 외출을 하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려 산발이 되고 바다를 오래 바라보고 싶어도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서둘러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 진다. 하지만 추울 때마다 카페나 식당으로 피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도 있고 카페에 가더라도 아이가 금세 지루해하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나 혼자라면 두어 시간 정도는 쉬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아이는 음료를 다 마시자마자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많은 경우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왜 외출을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때때로 꿈을 많이 꿨고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기 전엔 내일은 또 어딜 가야 할지 고민했고 꿈에는 내 모든 내적 갈등이 버무려져서 나왔다. 그 당시에 나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굉장히 복잡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고 삶이 엉망이라고 느꼈다. 우선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싶은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와도 자꾸 부딪혀서 육아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갔다. 제주 생활도 낯선데 집은 갑자기 춥고 좁아졌다. 제주에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코로나19 관련 재난안전문자를 받았고 아이의 개학은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아이를 맡길 곳도 없는데 앞으로 돈벌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마음이 조급했다. 한 가지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제주도가 다른 지역보다 코로나19 확진자수가 적었다는 사실이다. 제주에 오는 타이밍을 잘 맞추었다고, 또 마침 동생이 제주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처럼 몇 개월을 다니다 보니 이제 가고 싶은 곳, 가야 할 곳이 점점 줄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같았지만 느낌이 조금씩 달라졌다. 여행자 신분에서 벗어나 점점 제주도민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출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