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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말 Dec 11. 2022

남편을 피하는 방법

  소송을 취하하고 나서 어쨌든 남편과 잘 지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에게 잘 지낸다는 것의 의미는 쓸데없는 다툼을 하지 않고 최대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서로에게 간섭하지 말자는 내 말을 그는 역시나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듯했다. 주말에 육아를 분담하는 것 말고는 내 쪽에선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도 나에게 과한 요구를 하지 않기를 원했다. 가능하다면 하우스메이트 같은 그런 관계가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이기도 했고 때로는 집안일이기도 했고 대부분은 성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용서'를 얻은 것과 '섹스를 요구할 권리'를 얻은 것을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이제 서로 잘해보기로 했으니 성관계도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였다. 참고로 나와 그의 사이엔 아이를 임신한 후로 6년 동안 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와의 잠자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쾌했다. 그것이 그를 한 번 '용서'하기로 했다고 갑자기 '유쾌한'것이 될 리가 만무했는데도 그는 내가 관계를 거부하면 온갖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며 잠을 못 자게 만들었다. 나는 잠을 못 자면 정말 예민해지기 때문에 그가 그런 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수치심, 자괴감, 무력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도 뒤따라왔다. 나중에는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자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괴로운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는 생각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적당한 타협. 이것이 내가 벌을 받는 이유였다. 결혼할 때도 마음의 소리를 듣기보다 내 나이와 연애 기간 등을 더 고려했다. 남들 하는 것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혼하는 커플도 위기를 겪는데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었다. 결혼생활 초반에는 다른 점을 서로 맞춰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틈은 계속 벌어져 이젠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겐 날이 갈수록 이 관계가 끝났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몇 개월 동안 관계는 더 악화되기만 했다. 그는 나에게 아내로서의 의무,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나와 나의 부모님을 무시했다. 미우니 사소한 일로도 크게 다투게 되었다. 점점 그가 집에 있는 주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비아냥거림이나 수동적 공격 방식으로 교묘하게 나를 괴롭히고 있었고 나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나는 실제로 화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증상은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 확실히 심해졌다. 한의원에서 침 치료나 물리치료를 받아봐도 증상을 약간 완화시켜줄 뿐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지 않는 이상 계속 재발할 것이 분명했다. 육아 분담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를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주말엔 아이와 둘이서 1박 2일 혹은 2박 3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와 아이는 그가 집에 없을 때 예고 없이 출발했다. 실제로 여행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장소는 주로 서해안 근처였다. 숙소는 운전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했다. 아이와 단 둘이서 숙소를 잡아 여행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아주 신나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해방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항상 그와 대치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가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거나 압박할 방법은 많았다. 카톡으로 나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전화를 계속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를 차단해버렸다. 하루는 저녁에 간식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물건을 고르고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하려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결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정지시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가지고 있던 휴대폰마저 정지시켰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변명했다.) 그를 피해 멀리 나왔지만 올가미에 걸린 느낌이었다.


  

  내가 이 사람과 완전히 남이 되는 데는 어떤 희생이 필요하고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생각하니 두려웠다. 하지만 여행지에선 최대한 즐겁게 지내고 싶었다. 아이에게도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니 그와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편하고 좋았지만 어딘가 어둡고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지금 즐겁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아이는 흰색 그랜드 피아노가 있던 한 펜션을 좋아했다. 그곳엔 조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빵과 딸기잼이 있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다고 했다. 정말 저렴한 빵이었는데 그걸 좋아하는 아이를 보고 '네 마음에 드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일곱 살 아이는 여행을 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려서 그저 엄마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긴 했지만 엄마 아빠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이 특유의 쾌활함으로 잘 노는 모습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고 어린아이지만 의지가 되기도 했다. 우울한 상황은 어떤 감정을 더욱 진하고 선명하게 만드는 것인지 바닷가 파도 속에서 뒹굴며 놀던 아이, 반짝이던 스파클라 폭죽, 아이가 공원 연못에서 타던 작은 보트, 황홀했던 해변의 노을 모두 내게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아이와의 주말여행은 그를 떠나는 연습이기도 했고 그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기도 했다. 나는 너 없이도 아이와 잘 지낼 수 있다고, 네가 나를 압박할 수는 있어도 절대 가둬둘 수는 없다고, 나는 너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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