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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Oct 04. 2023

집을 내 집답게

EP.8-2 집을 내 집답게


계약은 당당하게 마쳤다만 실제로 입주를 해 수리를 해야 할 곳을 보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인생은 지르고 보는 거라고 하지만, 원래 지름 이후에 오는 후회는 오롯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몫이지 않나.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고향에서 어머니가 올라와서 내게 한 “무슨 이런 집을 구해서”라는 잔소리 역시, 나의 후회를 더욱 세게 밀려오게 했다. 하지만 이미 수유 원룸에서 꺼내온 짐들이 집들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보증금과 첫 월세까지 입금했다.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먼저 집을 청소하기로 했다. 일단 바닥과 가구, 창틀을 닦았다. 너무 오래 집이 비어있었던 건지, 전 세입자가 청소를 정말 안 하고 지낸 것인지 온 구석구석에 먼지가 덮여있었다.


먼지를 다 닦아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보니 전 세입자가 남겨둔 이상한 흔적들이 발견됐다. 싱크대 거름망에는 이상한 낙엽들이 끼어있었고, 세탁기에도 정체불명의 찌꺼기들이 다수 검출됐다. 그간 내가 지냈던 집들은 정말 전 세입자들이 깔끔하게 관리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금 열거한 부분 외에도 주방 후드에 낀 기름때, 곰팡이가 구석구석 박힌 욕실타일, 칼블럭(앙카)이 다 망가져서 나사가 반쯤 튀어나와 있는 비누걸이, 지저분한 수건걸이 등 손을 대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일단 내가 잘 청소할 수 있고, 잘 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약은 했다만 어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아, 나 망한 건가”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나 수리할 곳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내가 원하는 방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앞서 내 머릿속을 개조한 긍정의 사고력이 제대로 발휘됐다.


어머니와 대충 청소를 하고 가구를 배치했다. 그 당시 내가 가진 가구라고는 침대와 협탁, 달랑 둘 뿐이었다. 그래서 침대와 협탁을 집안에 두고 나니 뭐 변한 건 없었다. 다음날 어머니가 다시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고 난 뒤, 나는 대대적으로 집수리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 일단 주방의 기름때를 지워줄 전용세제와 화장실의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한 곰팡이 제거제를 구매했다. 이미 과거 반지하 생활에서 곰팡이 제거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곰팡이와의 싸움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주방 후드의 기름때였다. 후드에 기름때가 끼어있다는 건, 후드와 실외를 연결해 주는 덕트에도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것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덕트 전체를 교환하기란 꽤 까다로운 일이었기에,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씻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후드와 주방타일 구석구석 기름때 제거를 우선으로 두고 청소했다.


주방 정리와 화장실 곰팡이 청소를 끝내고 나니, 화장실 환기구에 까맣게 끼인 먼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바로 환기구 커버를 들어내서 먼지를 씻어냈고, 타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수건걸이, 비누걸이들을 제거했다. 이 작업이 꽤 귀찮았는데, 나사를 타일에 고정시키는 칼블럭들이 안에서 다 부서져 있어서 타일 구멍 사이에 박힌 칼블럭들을 다 펜치로 뽑아내야 했다. 그리고 변기 커버까지 다 들어냈다. 그러고 나니 욕실은 변기와 세면대만 달랑 놓인 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소위 ‘감성 카페’ 같은 공사장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젠장, 괜히 수리한다고 했나. 다시 그것들을 새 걸로 갈아 끼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최근 내 집의 풍경이다, 수리한 화장실을 찍고 싶었으나 너무 프라이버시였다.

수리도 인테리어의 연장선


집을 수리한다는 건, 인테리어 측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했다. 특히 욕실 같은 경우에는 어떤 재질의 부품들이 들어오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욕실 용품을 구하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특히 기존 용품들이 박혀있던 나사 구멍을 활용해야 했다. 새로 구멍을 뚫으려면 타일용 비트가 달린 드라이버가 필요했지만, 내게 있는 건 가정용 핸디 전동드라이버 밖에 없었다. 또 새로 구멍을 내더라도 기존의 구멍을 메워야 했는데, 요건 또 따로 점토나 시멘트가 필요해서 스킵했다. 그래서 겨우겨우 스테인리스 재질에 기존 욕실 용품과 사이즈가 비슷한 용품들을 찾아 주문했다. 새로 칼블럭을 넣고, 완벽하게 욕실용품을 갈아 끼우는 데에는 약 4만 원 정도와 1시간의 시간만 소요됐다. 월세 5만 원을 깎았으니 한 달 치의 깎인 월세 가격이 들었다.


그 외에는 가구들의 벗겨진 시트지들을 목공용 본드로 다시 붙이는 작업, 에어컨의 곰팡이 제거, 드럼 세탁기 청소 등에 필요한 약 1만 원의 청소용품을 사는 비용만 들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직접 청소하고 수리하는 데에 겨우 5만 원 밖에 들지 않았다. 직접 집을 수리하겠다며 월세 5만 원을 깎아 2년을 계약했으니, 나는 내 조금의 수고를 들여 115만 원을 아낀 거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원래 이렇게 아낀 비용이 '꽁돈'이라고 생각하는 법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아낀 비용은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115만 원의 공짜 돈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속에서 ‘115만 원을 어떻게 쓰지’라는 지름신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신내림을 받는 엄숙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이 지름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집의 인테리어는 무조건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일단 가구 전체가 다 낡았고, 바닥 역시 변색이 너무 심하게 되어 있어서 어떻게든 인테리어 용품들로 이 부분들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특히 낡은 가구들에 적절한 포인트를 넣는다면 낡음이 가려질 뿐만 아니라 시선 분산이 되어서 별로 잡티가 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방을 어떻게 꾸미지?’라는 생각보다 ‘방을 어떻게 해야 잘 보수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인테리어에 임해야 했다. 결국 방을 수리한다는 것 역시, 내가 살아가야 할 집을 내 방식대로 개조한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내가 이 방에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를 계획해야 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인테리어를 하다가는 집이 산만해지거나 집주인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방이 훼손되지 않고, 정갈하게 쓸 수 있을 정도의 인테리어만 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정도 삶의 방향성이 잡힌 내 집의 풍경이다

인테리어는 내가 살아갈 방향성


공간을 구성한다는 건 단순히 ‘예쁘게 만든다’의 문제를 벗어난다. 공간을 꾸미겠다고 각기 특색 있는 가구들을 구매해서 방에 배치해 두면 통일성이 깨지거나, 오히려 집을 꾸미지 않는 편보다 더 지저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내 인테리어는 실용성이 우선이었다. 단순히 공간을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공간의 지저분함을 가릴 수 있어야 했다. 게다가 팬데믹 시대였기에, 집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머물렀을 때도 지루함이 없을 만큼의 공간적 이벤트가 있어야 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한다만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예쁜데 안 지겨울 만한 인테리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목표를 정해두고 나니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곧바로 내 의식을 바꿀 수 있었다. 우선 내가 집에서 어떻게 살지를 정해야지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순서였다. 그래서 지난 약 4년간의 서울 생활과, 약 6개월간의 팬데믹 상황 속 생활을 떠올려봤다. 집에서 내가 자주 하는 것이라고는 묵상, 글쓰기, 책 읽기, 영화 보기, 드라마 보기 정도였다. 아참, 밥도 자주 해 먹었다. 그럼 동선은 단순했다. 뭔가 활동적인 취미를 할 분위기보다는 정적인 분위기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주요 오브제로 ‘책’을 선택했다. 책 하나는 기깔 나게 많았기에, 책들을 포인트로 해서 인테리어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책상은 최대한 책을 잘 볼 수 있도록 널찍하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키보드를 수납할 수 있도록 모니터 받침대를 구매했다. 그리고 바닥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두툼한 카펫을 깔기로 했다. 더불어 다소 어두웠던 가구들과 조도의 통일성을 주기 위해 침구는 어두운 색깔로 선택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는 수리하는 것보다 더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얼추 인테리어를 다 끝낸 시점은 이사를 하고 한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집을 내 방식대로 만들어갔다. 과거에는 집에 나를 맞춰 살았다면, 이제는 집을 나에게 맞출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월세를 내고 사는 집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서울에 나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부분에서 뭔가 4년 사이 많이 발전했다는 걸 느꼈다. 어떻게 보면 서울에서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을 공간적으로 구성하는 데에만 4년이 걸렸던 것 같다. 서울에서 살고 있었지만, 서울의 내 집에서는 살고 있지 않았던 과거였다고 생각했다. 이제 진짜 내가 수리하고, 내가 꾸민 집이 생겼다는 뿌듯함도 생겼다. 이제야 집이 내 집답다는 걸 느꼈을 때, 이렇게라면 정말 서울에서 혼자라도 잘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8화에서 1부 ‘서울 여정’을 마치고 다음 주부터 2부 ‘혼자 사는 삶’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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