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명호의 영화편애 Oct 09. 2022

봉준호감독, '기생충', 세계관과 미학에 관하여




영화 <기생충>은 한국영화사 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가 이렇게 칸영화제 최고상과 아카데미 영화제 최고상, 그리고 국내에서 천만 영화가 되는 경우는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다 사로잡은 신의 경지라고 볼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된 것이 어떤 사람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봉준호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본다면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종종 어떤 사람은 기생충보다 살인의 추억이 더 좋은 영화가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살인의 추억>도 물론 좋은 영화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봉준호 영화의 사실 주의 미학이 완성된 것은 <기생충>에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미학이 완성되었으므로, 이 후 봉준호감독의 행보는 더 다양해지리라 생각된다.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김기영감독의 <하녀>와 히치콕의 <사이코>의 영향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다.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티프가 봉준호에게 큰 영향을 준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기생충>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더 완성도 있는 영화미학을 보여주면서 지금의 시대에 맞게 스토리텔링도 새롭게 재구성된 완전한 창작물이라 볼 수 있다.



봉준호의 세계관



한 작가가 이야기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겉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는 계급이라고 하는 부조리한 피라미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부조리한 계급의 문제를 영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감독이 있으니 바로 봉준호 감독이다. 봉준호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계급 구조이다. 그것이 더 도식적으로 나타난 것이 <설국열차>라면 <기생충>에서는 좀 더 직접적이면서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다. 언제나 위대한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거대한 세계를 보는 관점을 담기 마련이다. <기생충>이 그렇다. 부자집, 반지하가족, 지하실의 가족을 통해서 계급 구조를 볼 수 있고, 또 국가간의 관계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은유적으로는 한 인간의 내면처럼 보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영화가 뛰어난 이유는 그의 세계관이 그가 추고하는 영화미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수직적인 구조가 카메라 무빙, 프로덕션 디자인, 음악 등 모든 영화적 요소가 주제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감독상까지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모든 감독 지망생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기생충 줄거리


영화에는 대조되는 두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부족할 것 하나 없이 살아가는 박사장의 가족과 반 지하에서 살아가는 전원 백수 가족. 

두 가족은 계급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마주 칠 일도 없는 사이이다. 

그런데 전원 백수 집안의 장남인 기우가 친구의 소개로 박 사장의 딸 영어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이 기묘한 만남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기우는 가족들과 작전을 펼쳐, 동생과 아빠와 엄마까지 차례로 취직을 시키게 되고, 계급 상승이 기쁨을 맛보게 된다...그런데 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날, 쫓겨났던 문광이 찾아오고 지하실에 놓고 온게 있다며 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으니 바로 문광의 남편이다. 충숙은 그들을 신고하려하다가, 반대로 가족이라는 것이 걸려 문광에게 약점이 잡힌다. 둘은 팽팽히 서로를 잡아먹을듯이 대립하게 되고, 결국 반지하가족이 문광부부를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탈출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어떻게 될까...



봉준호감독의 지하실 공간의 변주



역시나 봉준호 감독은 공간을 잘 활용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은 주제를 드러내는 미학적인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영화적 재미를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지상에는 평범한 삶이 펼쳐지지만 지하실이라고 하는 낯선 공간에서는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영화의 중요한 사건과 연결된다. 지하실이라고 하는 공간은 표면 아래의 세상의 무의식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흥미로운 공간이다. 그러한 설정이 봉감독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더욱 재미있다.


사실 그러한 모티프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등장한다. 아파트 지상의 풍경은 일상적이지만, 지하 보일러실은 뭔가 기이하고 낯설게 그려낸다. 경비원은 지하실에서 남몰래 보신탕을 해먹기도 하고, 또 보일러실에 귀신이 갇혀 있다고 하는 썰을 진지하게 풀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지하실에 음침함을 다루는 방식이 매우 소극적이고, 극적이지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역시 지하실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형사들의 추악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형사들은 언론에서는 살인범을 잡았다고 영웅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지하실에서 그들은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1980년대의 어두움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인간의 이중성, 시대의 이중성이 지하실이라고 하는 공간을 통해서 미학적으로 그려지는 듯 하다. 영화는 인간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소설처럼 구구절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지하실 미학은 인간의 내면은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고, 영화적이다. 


<괴물>에서도 역시 지하 하수구는 괴물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한강의 표면 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쉼을 즐기고 데이트하는 장소인데, 그 지하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감독이 이야기했듯이 괴물은 살인범이기 보다는 납치범이다. 괴물은 사람을 잡아서 자신의 은신처 하수구로 이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물론 뼈만 남고 죽은 사람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설국열차>에서 그런 수직의 구조가 수평의 구조로 바뀐다. 꼬리칸에 사는 하층민들이 앞 칸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한다. 물론 영화에서 수직적인 구조도 존재한다.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맨 앞칸에 도착했을 때 그 화려한 앞칸 지하에서 흑인 꼬마가 열차의 부품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커티스가 정신을 차리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옥자>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회사 사무실과 달리 지하에서 끔찍한 돼지 실험이 이루어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사무실은 너무 하얗고 깨끗하다. 그러나 그 사무실 지하실에서는 잔인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옥자는 매스컴에서는 화려한 스타이지만 지하실에서는 끔직한 실험 대상일 뿐이다. 옥자가 수컷 돼지와 강제로 교미를 당하는 장면이라든지, 동물학자에게 학대를 당하는 장면은 눈 뜨고 보기 힘들다. 그러한 거대 기업의 양면성을 영화는 그 지하실이라고 하는 공간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번 <기생충>도 지하실의 미학이 여전히 나타난다. 그 지하실이라고 하는 공간이 그 어떤 이전 영화보다 가장 극적으로 등장하고, 영화의 중반 이후에 등장함으로써 하나의 반전과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지하실의 공간이 등장함으로써 영화는 전반부의 이야기 전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하실 공간의 활용적인 면에서 그의 이전 영화에 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영화적으로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봉감독 영화에서 봐았던 지하실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하의 씬은 매우 낯설고 기이하고 공포스럽다. 



영화의 명장면



특히 영화의 마지막 씬 생일 파티 장면에서는 지상의 화려한 축하 파티와 지하의 끔찍한 살육전이 대비되어 교차 편집으로 그려지는데 그 콘트라스트는 매우 강렬하고 영화의 주제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광이 죽자, 평생 기생충 처럼 살았던 근세가 지하에서 지상의 세계로 나온다. 칼을 들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가득한 상태로. 그는 기우를 가차없이 돌로 내려찍고, 또 파티장으로 찾아가 기정까지도 칼로 지른다. 

무시무시한 살육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택은 항상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박사장을 칼로 찌른다. 계급 사이의 복수가 일어나는 장면이다. 지하실 가족은 반지하가족에게 복수하고, 반지하가족은 가장 상위계급에게 복수를 한다. 이런 복수의 복수가 일어나는 장면은 하나의 신화처럼 보이기도 하다.

기택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지하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세가 살았던 것처럼 기생충처럼 살아가게 된다.


결말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하필 기정이 죽는가이다. 기우는 돌을 머리에 맞고 피를 철철 흘리지만 그래도 기적처럼 병원에서 깨어난다. 이것은 감독의 신의 입장에서 기우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기에 그런 기적을 허락한 것처럼 보인다. 기우는 항상 돌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지하실 가족에게 했던 일에 대해 죄책감을 유난히 많이 갖는다. 사실 그가 죽게된 것도 죄책감을 갖고 그들을 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깨어나는 행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계급, 미장센, 카메라 워킹

이 영화가 ‘계급의 이야기’라는 것을 서사와 공간을 통해서 뿐 아니라, 미장센을 통해 전달한다. 그 중에 당연히 가장 중요한 숏의 디자인은 첫 숏과 마지막 숏에서 등장하는 틸트다운Tilt down 숏일 것이다. 창문의 숏에서 카메라가 내려가면 그 아래에 앉아 있는 기우의 모습이 보인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한국 청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숏이기도 하다. 마지막 숏에서 기우가 쪼그리고 앉아있을 때 첫장면과 앵글은 같지만 화면은 아예어둡다. 그리고 창문의 실낱같은 빛줄기만이 보인다. 그것이 그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장면이기도 한 박사장 부부가 쇼파에서 애무하며 사랑을 나누는 동안, 기택의 가족들은 테이블 밑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어있는 장면도 흥미롭게 디자인 되어있다. 그 숏의 설계는 두 가정의 계급을 미학적으로 보여준다. 그때의 카메라 워킹 역시도 수직 틸트다운으로 이루어진다. 소파는 상층부에 있고, 카메라가 수직으로 내려가면 테이블 밑에 기택의 가족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족의 계급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설국열차의 꼬리 칸과 앞 칸의 대조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는 계급의 이야기를 ‘냄새’라고 하는 모티프를 통해서 드러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 체험을 시키는 매체인데, 이 영화는 묘하게도 냄새까지도 느껴지게 한다. 박사장 부부가 기택의 가족에게 풍기는 냄새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는데, 그 냄새가 관객에게까지 느껴지게 된다. 감독은 아마도 영화의 매체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관객들이 오감을 통해서 영화를 체험하도록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물의 재난 역시도 계급의 차이를 드러내는 중요한 매개이다. 반지하 동네에서는 물침수로 난리가 난반면, 부잣집 사람들은 미세먼지가 사라졌다고 다행이라고 말한다. 집이 완전히 침수된 상태에서 변기통에 앉아 담배를 피는 기우의 모습은 처절하다. 몇 시간 전에 박사장집 욕조에서 시간을 보냈던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선과 악의 경계에 관하여

영화 <기생충>이 놀라운 것은 여기에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다는 점이다. 모든 인물은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하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뒤엉켜서 파국에 이르는 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다. 이런 세팅이 영화의 서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만, 사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우리 세상에는 완벽하게 악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계급 사회속에서 우리는 무한 경쟁을 하며 뒤엉켜 싸우다가 파멸에 이르는 것을 많이 본다. 점점 세상이 각박히지고 정글과 같다는 것을 모두가 느낀다. 

옛날에는 '착한사람 컴플렉스'라 해서 그러지 말라는 충고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착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다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생존을 위한 싸움이 더 치열해졌다.

억울한 것은 가장 상위 계급은 태평하고, 반지하 가족과 지하실 가족이 싸우는 것과 같은 풍경이 많다는 점이다. 어느 조직을 가든 아랫사람끼리 경쟁하고 싸워야하는 구조로 세팅되어있다. 윗사람들은 그 싸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구조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약자끼리 싸워야하는 구조. 

얼마 전 뉴스에서 한 진상 손님이 호떡 파는 아줌마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카페 알바에게 함부로 대하는 소식을 접할 때면 너무 화난다. 서로 연합하고 돕지는 못할망정, 그 와중에 상대를 짓밟고 내가 올라가려 하는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정글의 쇠사슬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안에서 뒤엉켜 살아간다. 마치 설국열차에서 커티스가 앞 칸에 도착해서 뒤를 바라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거기서 앞칸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막는 사람들이 뒤엉켜 서로를 죽이려고 싸우고, 커티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고뇌에 빠지게 된다.

절망과 희망

영화의 결말은 절망이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다. 기우는 그 험난한 인생을 잘 헤쳐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 역시도 기우의 모습을 보며 많은 공감을 했다. 나 역시도 한국에서 청년으로 살아가며 험난한 시간을 보냈다. 반지하 가족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돈을 벌면 버는대로 바로 기본 생활비로 빠져나가니, 도대체 나에게 희망이 있는가 수없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이 싸움은 끝도 없다. 실낱같은 희망을 지금은 조금더 키웠고, 앞으로는 더 환한 빛이 내 삶에, 그리고 우리의 모두에게 찾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하마구치류스케감독, '드라이브 마이카' 영화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