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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미미 Jul 24. 2022

옆 회사 팀장님의 힘빼라는 말, 춤추며 깨달았다

[암과 함께 춤을3] 몸과 삶의 균형을 맞춰줄 '힘 빼기'가 필요하다

30대 암환자가 되고 나서야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반려자의 보살핌 덕에 더 너그러워졌고, 치료 과정 중 느낀 점을 춤으로 표현하며 밝아졌고, 삶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를 살리는 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기자말]

▲  회의가 끝난 후, 팀장님은 웃으며 말했다.ⓒ unsplash


"힘을 조금 빼시면 좋겠어요." 



회사 다니던 시절, 협업 기관 팀장님이 건넨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함께 참여한 회의가 끝난 후 그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 조금 힘을 빼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의아했다. 내 상사도 아닌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의 조직은 일종의 발주처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실행자 역할의 우리 회사가 사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싫어할 리 없지 않나. 



회의 동안 나는 열정적으로 혹은 격정적으로 얘기했다. 사업을 몇 개월간 실행한 결과, 예상과 다른 이러저러한 점이 보인다고, 이 간극을 조율한 다른 방식을 적용하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논의해야 한다고, 그래야 제대로 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진심으로 사업이 성공하기를, 그 성공에 기여하는 한 사람으로 남기를 바라며 욕심부렸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말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했다. 



너무 힘이 들어간 상태는 주변의 무엇과도 통하기 어렵다. 직장 내 인간관계든, 사업 수행의 일 처리든, 내 몸과 맘의 거리든.



'그저 존재함'의 즐거움 



힘을 더하는 순간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기본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작든 크든 변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면, 그 움직임의 한 점으로 참여하고 싶다면, 그 순간 힘을 더할 줄 알아야 한다.



동시에 힘을 더한다고 항상 변화가 생기지는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겸손하게 내맡기는 순간, 힘 빼기의 순간을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암 환자가 되고 보니, 힘 더하기와 힘 빼기를 가르는 순간의 기준이 생겼다. 내 몸이다. 내 몸의 생명력이 제대로 순환하고 있는가. 나는 조직에 건강한 구성원으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가. 내 몸이든 조직이든 겉보기에만 좋지 않은가?



몸과 일의 더하기 빼기 균형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전처럼 계속 달려갔다. 다른 회사 사람이 멀리서 외친 '힘 빼기의 필요성'은 그저 묻혔다. 



신용카드 사용액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월말이 되면 계좌에서 사라진다. 그 놀라운 일 처리처럼 암 환자가 되자 힘 빼기는 불가항력으로 다가왔다. 



강제로 힘 빼기 '당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 과정을 받아들이는 데 인내심이 필요했다. 외부에서 몸 안으로 주사하는 항암약물은 어딘가 숨어있는 암세포뿐 아니라 내 힘까지 재워버렸다. 당연히 부작용도 뒤따랐다. 



덕분일까, 때문일까, 회사원 시절 생활 리듬과도 이별했다. 이별 후유증에 심란할 때도 많았지만, 다행히 주변의 도움 덕에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을 하든 빠르게 지치는, 힘 빠진 삶을 잘 받아들이는 중이다.


                     

▲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손가락에 몸을 내맡긴다. ⓒ unsplash


힘 빠진 채 추는 춤도 즐기게 됐다. 힐링커뮤니티댄스 스튜디오(춤의학교)에 가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손가락에 몸을 내맡긴다. 주로 오른쪽 검지부터 까닥거리기를 시작한다. 시작점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마 내가 오른손잡이고, 오른손 검지가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중 가장 익숙하고, 먼저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검지 첫마디를 까닥까닥, 두 번째와 세 번째 마디 관절까지 까닥까닥. 그러다 보면 옆 손가락들도 함께 리듬을 탄다.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한 리듬은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되어 몸 전체를 휩쓴다.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몸을 돌린다. 까닥거리며 앞으로 향하는 손가락을 시작으로 어깨와 상체, 골반과 발도 앞으로 동참한다. 



손가락 춤을 추다 보면 이 세상에 나와 손가락만 남은 것 같다. 손가락 뒷 배경은 그냥 배경으로 존재한다. 



나와 내 몸만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 '그저 존재한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그저 존재함'의 감각이 이런 즐거움일까. 설핏 웃음이 나온다. 혼자 추는 것 같지만, 내 몸과 함께 추는 손가락 춤은 재미있다. 여럿이 출 때는 어떨까?



춤벗들과 스튜디오에서 놀던 중 각각의 시그니처 움직임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어떤 움직임으로 기억될까.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기대하며 기다렸다. 내 앞에 선 십여 명이 모두 손가락을 펼친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특별한 동작을 그리지도,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공간이 그들로 꽉 채워진 것 같았다. 또한 고요했다. 그저 존재했다. 그걸로 충만했다.



손가락 통증이 일깨운 진실



그런데 손가락 춤에 맛들이기 시작한 지 얼마 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침대 위 비몽사몽 상태에서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잠결에 손가락 관절이 구부러졌는데 평소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 저항에 놀라서 잠이 깬 것이다. 구부러진 용수철의 펴지려는 힘을 눌러 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느낀 손가락 구부림의 어려움. 그때의 충격은 탈모의 순간과 비슷했다. 두피를 문지르는 손가락의 접촉과 함께 머리털이 먼지처럼 끌려 나오는 광경. 당시 거울 속 내 두피는 점점 털 없는 살가죽으로 변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손가락이 잘 구부려지지 않는 감각이 지속됐다.



이불 끝자락을 잡아 젖히기 위해 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더해야만 했다. 이후, 반려묘 웅미의 간식 비닐을 뜯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의 노화나 병증을 느끼기에 30대는 너무 일렀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란 충격에 며칠을 보냈다. 걱정도 됐다. 이러다 '손가락 춤'도 못 추는 거 아닐까. 내 몸 안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는 아닐까.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면 어쩌지. 이러다 생각보다 빨리... 살아있음이 끝나는 때가 오는 거 아닐까. 그럼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죽음'이란 단어는 항암 치료 초기 때만 해도 외계인 같은 말이었다. 낯설었고,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이 슬프고 아쉽게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함께 가꾼 우리 집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혼란스러웠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내 등의 편안함, 무릎 위에서 그르렁거리는 반려묘의 보드라움, 방 안 침대 위 잠든 반려자의 고른 숨소리를 떠나야 한다는 게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서 종교에 빠지려고도 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과정의 무섭고 괴로운 감정들을 어떻게든 토해내야,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 몸이 항암 약물을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켰다. 



몸이 알려줬다. 몸과 맘이 분리된 이 상황을 회복해야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고. 몸에게 용서를 구하고 감사해하는 시간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몸과 맘의 두려움을 움직임으로, 느낌으로 승화했다. 춤을 많이 추게 됐다.  



함께, 손톱의 춤을 추자고 

▲  만약 갑작스럽게 내 모든 힘과 숨이 빠지는 때가 온다면,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고 함께 손톱의 춤을 추자고.ⓒ unsplash


힘 빠진 삶을, 힘 빠진 춤을 즐기며 산다. 집 앞 골목길을 산책하며 만나는 담장 위 노란색 꽃잎과 덩굴을 보며, 반려자가 만든 반찬을 한 입 맛본 후 어깨를 들썩거리며, 베란다 실외기 위 내려앉은 까치의 날갯짓에 사냥 자세를 취하는 반려묘를 보며, 춤벗들과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웃게 된다. 느낀다. 행복감을.



그 순간과 공간을 놓칠까 봐, 잃을까 봐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대신 그냥 그 순간에 머문다. 나 혼자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행복하니 참 좋다. 내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도 행복해질 테니 행복에 죄책감 갖지 말고 그저 행복을 받아들인다. 



만약 평균적인 기대 수명보다 더 짧게 생명 활동을 멈추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때로 걸어가는 과정에 예상 못한 자극이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행복할 순간을 찾지 않을까. 힘이 빠져서 추게 된 손가락 춤에서 즐거움과 고요함과 평온을 발견한 것처럼, 손가락마저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손톱이라도 흔들며 재미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손가락 구부림 통증으로부터 심란했던 마음은 이렇게 정리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죽음도 이전보단 좀 더 가벼운 단어가 됐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이제 아침마다 깜짝 놀라면서 깨진 않는다. 손가락 관절에 영향을 주던 무언가가 사라졌는지, 통증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손가락이 까닥거리는지 알 수는 없다. 내 몸인데 내가 다 알 수 없다니. 역시 몸은 평생을 알아도 알아야 할 것 투성이다.  



지금 알 수 없음에 답답하진 않다. 이걸 알기 위해 대학병원 검사 뺑뺑이 벨트에 묶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으면 검진이다. 내가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에 앎이 오리라 생각한다. 



다만 아직 내가 건드리지 못한 문제도 있다. 만약 내가 평균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나 역시 괜찮지 않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힘 빠진 춤을 널리 널리 알려야겠다. 팔을 움직일 힘이 없다면 손가락을, 손가락마저 무리라면 손톱이라도 움직이며 즐거울 수 있다고. 만약 갑작스럽게 내 모든 힘과 숨이 빠지는 때가 온다면,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고 함께 손톱의 춤을 추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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