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배운 깨달음

두바이에서 배운 영어와 삶에 대한 몇 가지 깨달음

by 정보라

엄마, 여동생과 그때는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인천공항에서 인사를 하고 커다란 여행 배낭을 멘 채, Cathay Pacific 항공을 타던 날.


혼자 홍콩을 경유해 새벽에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면서, 제 마음은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직도 사과주스를 보면 그 당시 기내에서 마셨던 사과주스가 떠올라서 묘한 감정이 올라오곤 해요.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저는 매일이 도전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호텔 로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오갔고, 직원들 또한 42개국에서 모여 있었습니다. 국적도, 종교도, 언어도 모두 달랐지만,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은 단 하나, 영어였습니다.




처음 두 달은 특히 더 긴장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건 미국식 교과서 영어였는데, 막상 현장에 나와 보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인도와 아랍 국가에서 온 동료들의 억양,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온 프런트 오피스 동료들의 발음, 그리고 유럽 출신 매니저들의 다양한 영어.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제 귀에 너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수없이 물었죠.
“이게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영어가 맞아?”
“내 영어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던 거야?”
혼란스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저는 긴장해서 말문이 막힐 때마다 더 열심히 영어책을 붙들고 암기하며 연습했습니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라서 그런 걸 거야.' 틈만 나면 패턴 문장을 외우고, 머릿속으로 반복했죠.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암기한 문장이 실제 상황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말할 때 더 긴장하게 되었어요.

전 사실 그곳을 가기 전, 영어를 전공하고 영어도 가르친 적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자신감을 가지세요. 틀려도 돼요."라고 했지만 막상 정말 새로운 커리어 앞에서 허우적 되고 있는 저는, 실수를 두려워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겁쟁이로 변해있었습니다.


여러 상황을 겪으며 자신감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마음이 편해야 말도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난 외국인이야.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원래 이렇게 배우는 거야.”
그 순간 마음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억양이 다르다고 주눅 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건 틀림없는 문법이나 발음이 아니라, 저의 의도를 전하는 용기였으니까요.

돌아보면, 저는 영어를 전공했고 대학원 시절 영어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완벽해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완벽함에 대한 강박은 저를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묶어 두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두바이에서 깨달았죠.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던 영어는 시험을 위한 영어, 미국식 억양에 집착한 영어, 책 속에 갇힌 영어였을 뿐이었습니다.

두바이에서의 경험은 그 틀을 깨부수는 시간이었습니다. 영어는 시험지 속 문법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도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으니까요.




한 달 반 동안 호텔 교육을 받으며 이론과 실습을 통해 업무를 배워갔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수업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벨기에 출신 매니저는 말이 너무 빨랐고, 아랍과 필리핀에서 온 매니저들의 발음은 낯설었습니다. 무엇보다 교육 내용 자체가 제게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거든요.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많았지만, 차마 손을 들어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용기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내가 질문하면 다른 친구들의 흐름을 방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크게 자리 잡고 있었죠. 결국 모르는 걸 꾹꾹 눌러 담은 채로 수업을 따라갔습니다. 얼마나 제 자신이 답답하면 화장실에서 몰래 울다 나왔을까요.


돌아보면, 지금의 저는 그때보다 훨씬 당당하게 질문했을 겁니다. “잘 모르니 도와달라”라고 요청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질문하는 교실 수업에 익숙하지 않았던 제게는 그것이 큰 장애물이었지만, 결국 질문은 배우는 사람의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AI 시대입니다. 지식을 얻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묻고 어떻게 탐구할 것인가입니다. 질문은 단순히 답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열어주고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힘이니까요.
그러니 우리,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낯선 환경, 다른 문화, 빠른 속도의 업무, 피곤한 밤 근무, 그리고 다양한 나라 출신 동료들의 영어까지…. 호텔 프런트 오피스 직원이 된 것은 큰 전환점이었지만, 동시에 제게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불안과 걱정, 직장에서 겪은 일, 복잡한 감정과 작은 희망까지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버티기 위해,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펜을 잡았던 것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기는 제 하루를 정리하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는 루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습관은 어느덧 1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실수로 중요한 손님을 로비에서 맞이하지 못해 매니저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었고, 손님의 요구 사항 전화를 잘못 이해해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울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로비에 섰던 순간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모든 부끄럽고 아픈 경험들을 저는 일기장에 다 써 내려갔습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들을 글로 쏟아내며, 마음속 무게를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어요.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때의 일기장이야말로 제 성장통을 기록한 증거였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힘들고 지쳐서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이 결국 저를 단단하게 만들고,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었다는 사실을요. 일기장 한 장 한 장이, 결국 제 인생의 가장 값진 성장 기록이 되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두바이에서 제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영어 실력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값진 것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다름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리고 진심을 담아 대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영어는 그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호텔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는데, 요르단에서 온 친구가 저에게 다가와 “너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 하고 물었던 장면입니다. 그 질문은 짧았지만, 저에게는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또 짐바브웨에서 온 동료는 어느 날 진지하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너희는 같은 아시아 사람끼리 영어로 대화하니?” 일본인 동료 리에, 중국인 동료 트루디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제 모습이 그 친구에게는 신기했던 겁니다.

K-드라마에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과 대화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영어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단순히 말이 통한다는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이해해 가는 시간이었으니까요.

그 경험 이후,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는 분들이나, 반대로 해외로 일하러 나간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제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그들의 마음을 전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건, 그때 만난 호텔 동료들과 지금도 SNS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마음을 나눴던 기억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은 제 작은 배려를 여전히 소중히 기억해주고 있고, 저 역시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합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야말로 영어의 진짜 힘이 아닐까요? 시험 점수나 유창한 발음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마음을 연결하는 힘. 두바이에서의 경험은 저에게 영어가 단순한 언어 이상의 의미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영어는 다리를 놓아주었고, 저는 그 다리를 건너며 더 넓은 세상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바이에서 배운 이 교훈들은 교실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완벽한 영어보다 전달되는 영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용기, 그리고 언어보다 더 큰 관계의 힘을 배웠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는 여러분께 전하고 싶습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를 통해 사람과 연결되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세요.

그것이야말로 제가 두바이에서 얻은 가장 값진 배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