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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가J Oct 12. 2023

수능을 망쳤다.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조용한 학교에 걸어들어갔다. 정문에서부터 시험장까지 2분 남짓의 길 위에서 오늘까지의 여정이 스쳐지나갔다.


1,2,3학년 다 합친 전교생 50명 중학교에서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나왔다. 학생 수는 1000명이 넘었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맞았다. 얼마걸리지 않았다. 3월 첫 모의고사와 1학기 중간기말고사를 치고나니 맥이 풀렸다. 수학, 과학 점수는 턱없이 낮았고 그나마 좋아하던 영어 점수가 괜찮았다. 영어 하나만큼은 도시아이들에게 지기 싫었고 악바리로 공부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영어만 만족할 점수를 받았고 나머지 과목 점수는 암담했다. 


수능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담임선생님이 점수에 맞춰서 추천해주는 과에 진학했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대학교와 과였다. 원서를 쓰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날. 햇살은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얼음장이었다. 집에가서 부모님께 뭐라 말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의 생각 밖에 없었다.


'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


.

.

.


학과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니, 생각이 없었다. 이 과가 나에게 맞는지, 나의 진짜 목표와 꿈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잘 맞는 친구들과 놀고 주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저 열심히 했다. 과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학점 잘 받고 몇 명의 친구들과만 잘 지내는 그런 학생이었다. 내가 뭘 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생각은 깨지는 계기가 있었다. 푸르른 5월의 어느 날. 수강생이 100명이 넘는 전공과목에서 발표를 진행해야했다. 안락사를 주제로 선배님들이 가득 찬 교실에서 10분간. 가위바위보에서 졌기 때문에 발표는 내 차지였다. 대본을 짜서 헤질 때까지 연습했다. 낮은 성적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망의 발표날


" 내가 너무 못해도 돌 던지지 마라ㅋㅋㅋㅋㅋ 너무 길어지면 끊어라는 신호보내고! "


떨리는 마음 부여잡고 첫 마디를 뗐다. 초등학교 때 발표하기 싫어서 울었던 생각이 떠올라 갑자기 아찔해졌다. 눈물 따위 통하지 않는 대학생이었기에 덜덜 떨면서 발표를 했고 10분이 지나갔다. 후들거리며 단상에서 내려오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1학년 아니가? 발표 왜 저렇게 잘 하노? "


누가 말했는지 모르고, 그 사람은 그 말을 했던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나에게도 잘하는 것이 있구나. '


그 말 한마디는 내가 나 자신을 가두고 있던 틀을 부숴주었다. 이후 발표는 줄곧 도맡아서 하게 되었고, 2번째 직업에 도전할 때도 자신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아는 직업을 넘어서 삶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능을 망친 그날 시작된 의식없는 삶이 그 순간을 기점으로 깨지기 시작해, 첫번째 회사 사표, 150일간의 세계일주, 전공버리고 2번째 직업 선택, 그리고 작가, 컨텐츠 크리에이터로 이어져왔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이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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