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시 상암 소재 모 방송국의 막내작가였다. 당시 내 월급은 100만원. 감옥 같은 고시텔에서 월 45만원을 월세로 쏟아부으며 네 달을 버텼다.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나마 4개월을 머물렀던 건 그곳이 내 학창 시절 꿈꿔온 세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일하는 동안 늘 잠이 부족했다. 거진 이틀 밤을 새운 녹화날이면 화장실 변기에서 쪽잠을 자다가 흠칫 놀라 깨기도 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ㅇㅇ아, 너 출연진 시간 9시로 공지했어?"
그렇다. 10시까지 와야 할 출연진 D가 내 착오 공지로 인해 한 시간 일찍 방송국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름의 핑계를 대자면 전날 다른 출연진의 갑작스러운 펑크로 인해 우리 팀 작가 전원이 밤을 새웠고, 시간을 변경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지만 여하튼 내 책임이 맞다. 방송국이 뒤집어지도록 혼이 났다. 지금이라면 "네,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릴게요."라고 말하고 씩씩하게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몸과 마음이 너무 멍들어있었다. 늘 헐어있는 입술 안 밖, 과하게 줄어든 체중, 매일같이 차도로 뛰어들고 싶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더는 버틸 수 없으리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그 날 2부 녹화가 진행 중인 저녁 8시경, 나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렇게 십여 년간 꿈꾼 방송작가를 그만두었다. 홀가분함과 동시에 생각했다.
'아, 내 인생이 망했구나'
국문과 졸업생인 내가 뜬금없이 회계를 배우기 시작한 데에는 약간의 반발심리 탓이 있었다. 더는 글과 얽히지 말자는 심정이었다. 숫자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글과 반대편에 있는 과목었다. 또 작은 지방에서 국비로 배울 수 있는 직업교육이 몇 가지 안되어 선택의 폭이 좁기도 했다.
세무, 회계 자격증을 취득한 뒤로는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사업 부서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예산, 회계업무를 배워나갔다. 완벽한 직장이라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나를 인격체로 대우해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지 알게 되었다. 다만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주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언젠가는 벗어나야 했기에 공부를 놓지 않았다. 스스로 머리가 정말 나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벼랑 끝에 내몰리니 컴활 1급이건 한국사 1급이건 다 딸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3개월 차, 이상하리만치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다. 사업이 재선정되어 계약이 4년 연장되고, 업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때 이직을 결심했다. 이제는 떠나도 되겠구나 싶었나 보다. 이직의 기준은 두 가지였다. '정규직일 것'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곳일 것.' 이에 부합한다 생각되는 다섯 군데에 원서를 넣었고 지역문화재단을 비롯한 두 기관의 최종 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
결과 먼저 말하자면 지역문화재단 세무회계직렬에 최종 합격했다. 방송국에서 문화재단에 이르기까지 4년간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지나갔다. 방송국을 관두고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예능 방송을 이제는 종종 본다. 심지어는 내가 작가로 있던 프로그램을 봐도 마음이 썩 괜찮다. 시간이 고통을 희석해 준다는 증명이다.
나는 이제 인생이 망했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사계절 열심히 지켜온 작물이 한 번의 풍파에 스러지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나. 갈아엎은 흙에서도 뭐든 자라기 마련이다. 다시는 못 쓸 것 같던 글도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다시 밭을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