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한다는 것의 의미
갓 대학을 입학했을 때, 전공 기초 과목쯤에 해당하는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강조하시던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디어 스케치북"이었다. 아이디어 스케치북은 말 그대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작은 크기의 스케치북을 말한다. 기록의 형태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로 적거나, 혹은 사진 등을 붙이거나 등등 다양하게 할 수 있지만, 스케치북이란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대체로 시각적인 형태의 기록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아이디어"를 기록해 두는 용도이기 때문에 그 형태가 완벽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이 아이디어 스케치북도 평가의 하나였는데, 평소에 그림은커녕 작은 낙서도 가뭄에 콩 나듯 해왔던 나에겐 꽤나 버거운 과제였긴 했다. 학점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마치 진짜로 아이디어를 기록해 놓은 것 마냥 위조에 가까운 결과물을 제출하곤 했었다. 다행히 점수는 그럭저럭 받기는 했지만, 햇병아리 새내기였던 나는 그 당시에 이 과제의 의의를 잘 이해하진 못 했었다.
그런 내가 그 의미를 깨닫게 된 계기는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했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특별 초대전>을 보고 나서였다. 그 전시는 디즈니에서 만들었던 많은 애니메이션들의 제작과정을 보여준 것으로 내 기억으론 애니메이션 작품에 따라 전시 공간의 영역을 나누어 전시품들이 디피 되어 있었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채색하나 되어 있지 않고 연필선으로만 그려진 작화들이었는데, 그곳에 있던 것들은 완성된 캐릭터 디자인과는 다소 다른 외향의 캐릭터라던가, 얼굴 부위만 여러 장이 그려진 한 캐릭터의 여러 가지 표정 컷이라거나, 인물 하나 없이 배경만 그려진 다양한 구도의 그림들 등이었다. 그중 일부는 실제 애니메이션에 반영된 것들로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연필화로만 남겨진 것들이었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각각의 담당 파트 디자이너들의 여러 시행착오와 고뇌들이 고스란히 전혀 졌고, 때문에 색이 하나 입혀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에겐 전시장 흰 벽 위에 수놓아진 그 수많은 미완성의 기록들이 그 자체로도 하나의 작품같이 느껴졌었다.
아이디어는 사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향으로 한 번에 딱딱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아이디어 스케치북이다. 평소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데이터 베이스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아이디어가 고갈된 순간 탁! 펼쳐놓고 되짚어 보다 보면 기록을 할 당시에는 생각지 못 했던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원천소스 삼아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구현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전공 기초 과목의 교수님께서 새내기였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고, 디즈니 전시와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내가 실감하게 된 사실이다.
공부를 지속하고 있는 지금, 이젠 나에겐 그림으로 그리는 아이디어 스케치북은 없다. 대신, 5.4인치짜리 '아이디어 노트'(라고 쓰고 스마트폰)이 함께할 뿐이다. 이것은 내가 더 이상 '그림'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고, '글'이란 도구가 나에게 더 적합하기 때문에 생긴 변화이다. 낙서마저 남기는 것을 하지 않던 내가 도구를 바꾸면서까지 계속 무엇인가 남기려고 하는 이유는, 필요로 할지 모르는 훗날의 언젠가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