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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Apr 21. 2023

들키고 싶지 않은 플레이리스트

카다시안 가족 따라잡기. 삐루빼로를 보면서.

 숨기고 싶은 플레이리스트가 있는가? 요즘은 '지금 무슨 노래 들으세요?'라는 숏폼 콘텐츠가 유행하면서 내가 듣고 있는 노래를 자연스럽게 공개하는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뉴진스의 하입보이요'라고 답하면서 사실은 조금은 알려주기 민망한 음악이나 콘텐츠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음악 취향은 별로 숨길 것이 없는데, 보고 있는 영상 콘텐츠의 플레이리스트는 좀처럼 숨기고 싶어질 때가 많다. '투 핫'이나 '러브 블라인드' 같은 허구인 걸 다 알고서도 리얼리티라 믿고 가끔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던지, '4차원 가족 카다시안 따라잡기' 같은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숨기고 싶어 진다. 


 킴 카다시안을 포함한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새 시즌이 공개되는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면 민망함은 더해진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주전부리를 챙겨 티비 앞에 앉아 '오늘 저녁은 이거다!' 하면서 은근히 기대에 찬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여러 이유로 지탄이란 지탄은 다 받고 있는 카다시안 가족의 이야기를 뭘 그리 기다렸다는 듯 챙겨 보는 것인지 나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예능 프로그램을 이렇게까지 즐겨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그전에도 물론 열심히 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대에 차서 쾌락적으로 콘텐츠를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은 새롭게 다가왔다. 


왜일까. 


 나는 왜 카다시안 가족의 막장 이야기를 이렇게 숨어서 몰래 즐기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늦게까지 카다시안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콘텐츠에서 내가 어떤 점을 특히 좋아하며 보고 있는 것인지, 카다시안들을 보고 있는 나와 내 안의 나를 분리시켜 관찰해 보기로 했다. 나는 그들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이나 뷰티와 패션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는 것인지라던가, 뭐 그런 이야기가 좋아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지고 볶고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만, 그래도 가족 간의 갈등은 대화로 해결하고,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얘기하며 서로 협상하고, 누군가가 힘든 일이 있거나 멀리 출장을 간다면 서로 함께 일정을 맞춰 따라가 응원해 주는 모습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카다시안 가족의 유명세를 만들어낸 사람이자 지금까지도 그 많은 가족 구성원의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엄마인 크리스 카다시안에게 모든 가족이 어떤 형태로든 의지하고 있고, 자녀의 일을 통해 돈을 벌로 있긴 하지만 어쩠던 가족의 중심을 강하게 쥐고 있는 엄마 역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가족의 형태와 분위기, 서로 의지하는 모습들을 바랐던 것일까?


 처음에 나는 내 안에 그런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채워지지 않은 가족애에 대한 갈증으로 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안의 그런 욕구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알게 됐다. 내 욕구는 사실 채워지지 않은 엄마의 욕구였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죽음이 가족들과 엄마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고 늘 얘기했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엄마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는 귀한 딸이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자리는 엄마가 끝내 정을 주지 못한 '새엄마'가 차지했고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며, 외삼촌들도 각자의 삶을 사느라 엄마에게 아무도 '외할머니'처럼 엄마의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어렸을 때도 아니고 다 크고 나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때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그때의 상실을 결혼하고 나서 새롭게 꾸린 엄마의 가정에서 이루고자 했다. 엄마의 머릿속엔 엄마가 꿈꾸는 특정한 형태의 가족상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상'이 있다는 것은 목표가 뚜렷해 짐으로써 발전의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 '상'이 생김과 동시에 '현재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했다. '가족상'이 생김으로써 '가족'은 사라진 것이다. 엄마는 엄마가 꿈꾸는 '가족상'에서 우리가 벗어날 때마다 크게 좌절했고, 그 좌절을 격렬히 표현했다. 때문에 나는 엄마의 결여와 욕구를 내 것으로 가져와 오롯이 내가 그런 욕구를 가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족애를 애써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강력한 모성이 이끄는 가족의 상을,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와 상의하고, 끊임없이 헌신적인 엄마 중심의 가족 이야기를 이토록 열심히 보는 모습은 알아차리고, 거리를 두고, 프로세스 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루게릭 투병 스토리를 열심히 올리는 유튜브 채널 <삐루빼로>도 빠지지 않고 보는 콘텐츠 중 하나다. 하는 일에 영감을 받고자 구독을 시작했지만, 사실 나는 삐루빼로 가족의 화목함을, 아픈 딸을 돌보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밝고 헌신적인 어머니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맹장염 때문에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엄마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밤새 끙끙 앓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유튜브 속에 넣어 두는 것이다. 


 나의 투사를 알아차리고, 투사된 욕구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것들에서 나를 분리한다. 


 엄마와의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풀면 풀수록, 일에 대한 내 집착을 덜어낼수록 나는 오히려 득도한 것처럼 명쾌하다거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행복한 느낌은 없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거나, 그 불안이 무기력을 불러올 때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동일시하고 살아왔던 것에서 나를 분리하는 일은 내 머릿속의 환상처럼 명쾌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다행인 것은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잘하고 있는 척' 나를 속일 필요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잘살아!', '나는 괜찮아!', '나는 행복해!'같은 소위 '정신승리'는 필요 없어졌다. 고통을 알아차리고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기쁜 마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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