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따라 내 주면, 이야기가 오고간다.
차를 마시면 끊임없이 대화가 오간다. 처음 차를 마시기 시작할 때는 차는 조용히 마셔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냥 막연히 그래야할 것 같았다. 술자리에선 주로 왁자지껄 큰 대화가 오간다면 찻자리에서는 그 보다는 차분한 대화가 오간다. 소리가 작다고 했지 대화량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한번 앉은 찻자리에서 3시간이 넘도록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일이 잦았다. 처음 보는 팽주(차를 내어 주시는 분)분들과도 그랬다. 차의 맛으로 시작해 어제 있었던 일, 내일 할 일을 굳이 얘기하기도 하고,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와 여행에서 만난 일들, 재미있게 읽었던 책, 인생 최대 위기라고 생각했던 순간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화가 오간다.
술이나 커피가 상승 기운이라면 차는 차분하게 기운을 내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때문에 요가나 명상에서 차가 항상 함께 한다고.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출동!'의 기운이 들지만 아침에 차를 마시면 '시작~'의 기운이 돈다. 다관과 찻잔, 숙우를 데우고 찻잎을 적절한 온도에 우려내고, 그 차를 또 걸러서 숙우에 담았다가 마침내 찻잔에 담고서야 한 모금의 차가 완성된다. 티백이나 큰 티팟에 한꺼번에 차를 우리는 간편함을 요즘도 가끔 이용하기는 하지만, 구태여 이렇게 두 모금 남짓 되는 양으로 차를 불편하게 우리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차의 맛도 그렇겠지만, 이 과정 자체가 '리추얼'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땐 차만 마시는 것. 누군가 명상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한다고 했다. (사실은 커피를 마실 때 커피만 마시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작은 다기를 씻고 데우고 우리고 걸러내고 마침내 한 모금의 차를 조용히 마시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샌가 그 순간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집중의 순간들에 대화가 오간다.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은 찻자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조용히 차를 따르면 아무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팽주 역할을 4일동안 하게 되면서, 주로 털어놓던 사람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차를 따르는 나에게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잘 들어주겠노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 차를 내 드린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듣게 되었다. 처음 본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 만으로 그게 어떤 힘을 가지는지, 나는 경험으로 그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 귀로 들어온 이야기들은 사르륵 사라졌다.
정리되지 않은 일들을 가득 안고 다녀온 여행이었지만,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 수록 정리되지 않은 상태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정체성을 계속 찾고 싶은, 나는 특별한, 남들과 다른 나를 계속해서 찾으며 구분짓던 분리욕구도, 낯선 이들이라도 깊이 연결되고자 했던 연결욕구도 이제는 예전처럼 강하게 올라오지 않았다.
화개와 하동에 갈 때마다 포근하게 안겨있는 느낌이 든다. 지리산이 '엄마 산'이라 그렇다고 했다. 산이 너무 예뻐서가 아니라, 차 맛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따뜻한 느낌을 감각할 수 있는 곳이라 하동이 좋다. 20대-30대 초반의 이태리열병에서 화개와 하동 열병으로 옮겨간 것일까. 불안과 두려움으로 스파크가 팍팍튀던 때를 지나 보내는게 나이 드는 것의 최고 매력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