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친구들과 함께한 강원도 여행 - 강릉, 삼척, 동해
채식하는 여자 6명이 함께하는 강원도 여행이라. 그래도 꽤 자주 본 사이인 친구도 있지만, 또 누구인지 알고만 있는 정도의 아직 낯선 친구도 포함한 그룹이라. 태풍과 긴 장마, 무더위에 지쳐 멀리 움직이는 게 싫은 시기였지만, 매주 강원도에 가서 바다 수영을 하다 올해는 같이 가주던 친구의 사정으로 한 번도 못 갔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즉시 소집된 여행 메이트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비건이거나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니, 적어도 먹을 것으로 갈등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2박 3일간 함께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기도 했다.
모두가 서울에 사는 것이 아니니 동시에 강릉에 도착하기도 어려웠고, 서로 낯선 사이도 있다 보니 합이 맞지 않거나 서로 배려하느라 명확히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 생긴 우여곡절도 사소하게 있었다. 뭐 그런 것들은 사소하게 넘기고 2박 3일을 기갈나게 즐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연식물식. 모든 일정에 자연식물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는 이튿날 강릉 새벽농산물시장에 다녀온 다음 먹은 자연식물식 아침상이었다. 강릉 새벽농산물시장의 물가는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큰 사이즈 수박은 만 오천 원, 작은 사이즈는 만원이었다. 복숭아는 8개에 만 오천 원. 국산 블루베리 500g에 만원이었다. 두부는 한 모에 2500원, 반 모에 1300원이었다. 감자는 수북이 한 봉지에 3천 원. 망원시장 큰 손은 강릉시장에서도 큰 손이었다. 딱복, 물복, 황도를 섞어 6개를 사니 상처 난 복숭아를 네 개나 더 담아주셨다. 순두부도 두 봉지 가득. 네 명의 손에 가득히 과일과 두부가 들려있는데, 우리가 쓴 돈은 6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농산물 시장이라 다른 고기나 해산물을 파는 곳이 없는 것도 좋았다.
사온 과일들은 죄다 씻어 다듬고, 감자는 한 시간을 푹푹 찌고, 전날 사온 옥수수는 데우고, 두부에는 미리 만들어온 비법 양념간장을 곁들이고, 전날 저녁에 포장해 온 수수부꾸미를 다시 구워냈다. 순두부를 두 그릇씩 먹고, 감자에 옥수수, 과일까지 먹으면서 '맛있다'를 수도 없이 외치던 아침 식사. 서울에도 다 파는 재료들이지만, 갓 수확한 작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섬세한 맛들을 만끽 하며, 또 식물로만 이루어진 밥상에 정수를 찍은 것은 서로 채식 밥상에 만족하며 내뱉는 '맛있다'는 호들갑이었다.
남은 과일과 찐 구황작물들은 싸 다니며 하염없이 주섬주섬 간식으로도 먹고, 마지막날까지 아침 식사용 과일이 되어주었다. 정말 이토록 값지게 쓴 6만 원이 또 있을까.
두 번째 요소는 '토종 씨앗 농사게임'이었다. 누군가, 어디선가 발견한 이 보드게임은 24 절기에 따라 씨를 '따 내고', 심고, 거두는 게임이다. 봄 가뭄, 여름 장마, 가을 태풍, 겨울 한파에 발이 묶이면 내 작물을 도로 뱉어내야 하고, 상대의 밭을 GMO와 F1씨앗으로 공격할 수 있다. 이 단순하게 들리지만 세상 복잡한 보드게임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룰들이 있다. '농사의 원리에 따라' 참여자들이 정해도 되는 규칙이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농사의 원리를 모르는 우리는 여전히 '이게 맞아..?' 하며 즐기고 있는 중.)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에 가치를 두는 우리를 완전히 홀리기에 충분했다. 아침 먹고 한 판, 저녁 먹고 세 판. 팀으로 한 판, 개인전 한 판, 팀을 바꿔 한 판. 여행 후 일상으로 돌아와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 '농사게임 하고 싶다'를 인사로 하게 될 정도.
마지막 요소는 어떻게든 행복을 찾는 우리들의 힘에 있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갔지만, 여행 전날까지 태풍이 몰아쳤던 한반도의 바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입수는 금지되어 있었다. 먼 길을 왔는데 (그것도 바다 수영 하겠다고!) 입수가 금지된 상황에 실망할 법도 하지만 (아마도 실망은 잠시 다들 했겠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구멍이 뚫려있는 조개껍데기들을 찾아 목에 걸고, 귀에 걸고, 신발에 걸고, 가방에 걸고... 더 예쁜 조개를 찾을 때마다 서로 자랑하고 선물하고. 11살짜리 내 조카도 시시해서 이렇게는 안 논다고 할 것 같은 놀이들을 하며 논 순간을 아직도 자주 되새긴다. 어디에서도 스스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능력. 가끔 혼자 있을 땐 그 능력이 잘 발휘가 안되고 숨어있는 날들도 있지만, 그날 송정해변에서 만큼은 함께 그 능력을 잘 꺼내 썼다.
함께 있으면서 나는 또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을 간절히 바랐다. 내가 가자고 사람들을 모아 온 여행이지만, 중간중간 또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갈구한다. 나의 분리욕구를 바라보며, 또 분리욕구가 있는 만큼의 연결감을 바라는 마음도 바라보는 시간을 틈틈이 챙겼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는 하루 더 머물렀다 왔는데, 정말 우연히 계획에 없던 묵호항에 갔다가 멋진 차실을 발견했다. 시간을 많이 보내지못해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다음엔 묵호로 바로 왔다가는 여행을 품게 됐다.
여러 가지 차와 다기를 챙겨가서 틈만 나면 차를 울렸다. 혼자서도 마시고, 모두에게 차를 계속 우려주기도 했다. 한 멤버는 여행에서 돌아와 다기와 차를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영업 성공인가! 앞으로 또 함께 만나는 시간에 더 자연스럽게 차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즐겁다.
강원도 바다는 험하고, 한국인들은 그 험한 바다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놀며', 죽음과 생명의 시작인 바다라는 공간을 함께 느끼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몇 주 전, 글쓰기가 너무 귀찮아져 GPT에게 미리 강릉 여행기를 써달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 다시 그 글을 보니, 일부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함께한 여정을 통해 존중하고, 믿어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친구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