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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Oct 16. 2023

"말해봐. 오늘 하루 어땠어?"

발리 이야기 1. 커뮤니티 테이블에서 커뮤니티를 만들다.

"일로와! 일로 와서 여기 나랑 같이 먹자."


 발리 첫 숙소이자 일정이었던 요가&명상 센터 우다라(Udara - 인도네시아어로 공기를 의미한다고 한다.)의 정원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테이블들이 있다. 최대 4인까지 앉을 수 있는 정사각형 테이블이 일곱 개쯤 있고, 혼자 식사하기 좋은 바 테이블도 세 자리가 있다. 가운데에는 최대 8명까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두 개 있다. 그 큰 테이블 가운데 혼자 앉아있던 A는 나를 그 큰 테이블로 불렀다.

며칠이 지나서야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이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 위한 ”카뮤니티 테이블“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 지금 나한테 얘기한 거야?"

"응. 혼자 왔지? 같이 먹자. 나도 혼자야. 내 이름은 A야. 너는?"


  주로 외향인인 편에 속하지만, 이제 막 발리에 도착해 이곳의 분위기를 살피며 다소 내향적인 한국인을 연기하고 있던 나에게 A는 먼저 손을 뻗었다.

'참 사랑 많이 받고 자랐을 것 같은 아이네.'

 순식간에 나는 또 습관처럼 상대를 판단했다.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도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밝고 당찬 기운. 아무도 그 눈에 대고 'No!'를 외치지 못할 것 같은 아름답고 큰 눈. 전성기 때의 '엠버 허드'를 닮은 미소. 참 예쁘고 밝은 아이가 날 불러줘서 몸 둘 바 몰랐다.

 

우리는 큰 테이블에 마주 앉아 아침 메뉴를 골랐다. 스무디를 마실지 갓 짠 주스를 마실지. 그리고 아침 메뉴는 어떤 것을 먹을지. 후식으로 뭘 먹을지, 아니면 따뜻한 차를 마실지. 커피는 어떤 것이 좋을지. 예의상 주고받는 대화 끝에 주문을 마쳤다.


 커피와 음료가 나오고, 어색함을 뒤로한 채 어디에서 왔으며 이곳을 왜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A가 또 다른 사람을 테이블로 초대했다.


 "여기야! 이리 와. 여긴 바히네라고 해. 한국에서 왔대. 여긴 B야. 룩셈부르크에 살아. 원래는 러시아 사람이고. 우린 어제 여기서 처음 만났어.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 같이 온 친구인 줄 아는데, 우리 그냥 어제 만난 사이야."

 "우리가 어제 어떻게 말을 트게 됐는지 들었어? 얘 진짜 웃긴 애라니까. 나는 러시아 사람이잖아. 러시아 사람답게 무뚝뚝하게 있었어. 혼자. 저 테이블에서. 그냥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붙이길래 혼자 '나는 지금 묵언 수행 중이다'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된 김에 늘 해보고 싶었던 위빠사나 명상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근데 얘가 내 앞에 앉더니 밥을 시켜서 자기 밥을 다 먹고 나더니 글쎄. 포크랑 나이프를 이렇게 딱! 하고 내려놓더니 나한테 아주 단호하게 말하더라고. '자 말해봐. 오늘 하루 어땠어?' 이러는 거야. 나는 너무 당황해 가지고 '나...? 나한테 말하는 거야? 나 묵언수행 중이야.' 이렇게 말해버린 거야."


 처음 만나자마자 연신 연기를 해가며 어제 있었던 일을 재현하느라 바쁜 B와 본인의 모습을 연기하는 B를 보며 꺄르륵 웃기 시작한 A. 나는 앞으로의 열흘 남짓이 이들 때문에 아주 즐거울 수 있겠다는 것을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앞 뒤 다 자르고, 그것도 밥 먹는 중이 아니라 다 먹고 나서 그렇게 물었다고? 아주 맹랑하네?"

 "그러니까. 그래서 하지도 않은 묵언수행을 깨고 내가 고분고분하게 오늘 하루 어땠는지를 말하게 되는 거 있지."

 "아니 나는 정말 조용히 혼자 밥 먹는 거 잘 못한단 말이야. 나 태어나서 혼자 여행 온 게 처음이거든. 늘 남자친구나 가족이랑 여행했지, 이렇게 혼자 여행온건 처음인데. 혼자 여행 오면 혼자 조용히 있어야 해? 정말 몰라서 그래. 아니잖아. 우리 같이 먹자. 같이 밥 먹고 같이 놀자."


 그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 밥을 같이 먹기 시작한 우리는 각자가 여행을 마치고 이동하거나 돌아가는 날까지 매일 그 큰 테이블에 앉아 혼자 여행온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짧게는 6일, 길게는 10일을 함께 보냈다. 정말 잠자는 시간 말고는 명상, 요가, 스파까지 같이 하다 보니 짧은 시간 내에 정을 나누게 게 되었다.


  C가 합류한 것은 내가 그곳에서 벌써 일주일을 지냈을 때였다. A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이었다. C는 우다라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러 리셉션에 갈 때부터 뭔가 어두운 기운이 있었다. 여행을 온 사람치고 잔뜩 지쳐있는 어깨에 묘하게 화가 난 것인지 지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자세히 들리진 않지만 리셉션과의 대화 중에도 날이 서있는 듯했다. 일주일을 요가와 명상, 스파를 하며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진 우리 셋과는 다른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셋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진 않았다.


 "나 여기 앉아도 돼?"

 내밀지 않은 우리의 손을 잡아끌어낸 것은 C였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우리 테이블에 앉아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했다.

 "그럼! 물론이지. 앉아 앉아. 배고프겠다 시간이 늦어서. 어디서 오는 거야?"

 "난 밀라노 사람인데, 지금은 스위스에서 일하고 살고 있어. 아니지. 이제 일은 안 해. 잘렸거든.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야. 내 보스는 진짜 최악이었어. 정말 악마 같은 사람이야.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나 때문에 남자친구도 스위스로 이사했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남자친구랑 이별할지도 모르겠어. 몰라. 내 인생은 엉망이야 지금."


"..."

"... 일단 저녁을 먹어보는 게 어때? 여기 템페 레투스 랩이랑 레몬그라스 생강차가 우리 최애메뉴야. 한번 먹어봐."

 저녁을 먹는 와중에도 그녀는 날이 서있었다. 어떤 주제의 대화에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스페인 어디가 놀러 갔더니 좋더라- 하는 대화에는 '그래서 그게 어딘데. 정확하게 그게 어딘데. 여름에도 사람이 많아?' 같이 맥을 끊어대는 연이은 질문에 나는 괜스레 눈치를 보게 됐다. 이태리에 열병을 앓았었고, 여전히 앓고 있다는 말을 건넬 타이밍도 놓쳐버린 채 그녀의 가시를 그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 세계사와 지리적인 사고를 심도 깊게 요구하는 답변을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혹시 노여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레몬그라스 생강차에 꿀을 한 스푼 크게 타드릴 테니 너그러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누가 봐도 C의 이모벌은 되어 보이는 B의 말에 C는 드디어 웃어 보이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화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좀 예민해."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식당 직원들이 모두 퇴근을 한 뒤로도 이어졌다. 더 이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제안했다.

 "지금 요가실 비어있을 텐데, 프라이빗 그룹 세션 어때?"

 그렇게 우리 넷은 깜깜하게 비어있는 요가실로 갔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우리 넷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대나무숲이 되었다. 최근까지도 엄마에게 '엄마상'을 요구함으로 인해 괴로웠던 내 마음을 털어놓고, 손에 꼭 쥐고 있던 '엄마 환상'을 놓음으로써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돌아오고 있는지를 고백했다. 지난 3년이 나에게 어떤 시련이었는지. 그 시련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언제나 내 '플랜 B'는 한국의 산사에서 스님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어린 시절 수도 없던 학대에 사실은 아직도 마음의 문이 꽁꽁 닫혀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사람들을 웃기고, 늘 평화를 지향하며 갈등을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 모든 사람을 쉽게 믿고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늘 뒤돌아서 배신에 배신을 이어하는 문화에 지칠 때가 있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한 번도 남에게 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요가원 앞의 짱구 바다의 파돗소리는 규칙적으로 '촤아-촤아'소리를 내며 밤새 들려왔다. 식당 불이 꺼지자 드러나는 별들을 보면서, 손톱달에서 달이 차올라가는 것을 매일 같이 보면서. 우리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준 사랑이 꼭 그 사람에게 돌아오진 않더라. 근데 그게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한테서 오는 것 같아.근데 그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게 처음엔 진짜 아파."

 "사랑도 에너지야. 내 안에 그 사랑이 너무 가득 차버리면 나는 줄 수밖에 없어. 안 그러면 너무 꽉 차서 터져버리니까. 줘야 되잖아. 근데 내가 비어있는 상태면 이 몇 안 남은 사랑의 에너지를 남에게 주고서, 비어버린 내 내면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리게 되는 거더라고. 넘치도록 채우고 나면, 주는 사랑에 아쉬움이 없어져."

 "지금 이 바닥인 상태의 나는 부정하고 있지 않은지, 이 바닥상태의 나도 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지. '언제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 막 만난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언제나 낯선 사람에게 더 마음을 열고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다는 걸, 지난 몇 년간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조금 더 안정적인 상태일 때,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이 찰랑찰랑 차 있을 때 이 사람들을 만난 것에 감사했다. 깜깜한 요가실에서 우리만의 '프라이빗 세션'은 그 이후로도 종종 이어졌다.


 그러다 B가 발리 일정을 마치고 베트남 여행을 떠나게 됐다. 베트남에서 5일을 머문 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베트남을 잘 즐기고 가라며 열번이 넘는 포옹으로 배웅을 해준 지 18시간 뒤. B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베트남에 갔다가 다시 발리로 돌아간다. 비자가 필요하대. 온라인 비자는 5일 걸린대. 갈 곳이 없다."

 이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인지. 우리는 동시에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없긴 왜 없어! 우다라가 있지. 우린 여기 그대로 있어. 내 방 침대 두개야. 얼른 와."

 너덜너덜 해져 돌아온 B에게 우다라는 이전보다 조금 더 천국 같은 곳이었다. 비자 같은 것은 없어도 두 팔벌려 환영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템페 레투스랩에 두부 커리 수프, 레몬그라스 생강차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곳. 끝도 없는 농담을 주고 받는 사장과 모두의 이름과 취향을 외워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크루들까지. 그녀가 다시 돌아온 뒤 우리 그룹은 왠지 더 공고해진 느낌이었다.


 "근데 B, 직업이 뭐야?"

 "위기관리자."

 "푸하하하하하. 니가? 위기를? 뭘 관리한다고? 어머머머. 완전 웃겨."

 "내가 커리어를 이렇게까지 성장시킨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야. 다 끌어당김 덕분이라고. 근데 내가 베트남을 끌어당기진 못했네. 너네를 너무 끌어당기느라 베트남을 못끌었어."


 "아직도 안 갔니? 벌써 한 달 째잖아. 이 악동 같은 우다라 갱단 같으니라고!"


 이곳의 사장인 M은 우리 테이블을 보며 늘 농담을 던졌다. 일주일 넘게 투숙하는 나를 보며 늘 '한 달째 계신 분'으로 다른 손님들에게 소개했다. 그럴 때면 '아 사장님 마음속에 말씀이시죠? 그쵸. 그건 한 달 좀 넘었죠.'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여기 진짜 갑자기 오겠다고 결정하고 도망치듯 온 거거든. 오는 길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고. 공항에서 울면서 여기 리셉션에 내가 뭐라고 메시지를 보냈는지 알아?"

 "뭐라고?"

 "안녕. 나는 C라고 해. 나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붕괴되었어. 나는 치유가 필요해. 내일 4시에 마사지, 내일 저녁 7시에 프라이빗 트라우마 세션 예약 해줘. 이렇게 하면 얼마야?"

 "푸하하하하. C야. 너 여기 리셉션 사람들이 완전 미친 사람인 줄 알았겠다. 사람들 그만 태워."

 "내가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걸 내가 지금 알았어. 그때 진짜 정신이 없었나 봐. 정말 미친 사람이 맞았지 뭐. 진짜 지금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 미쳐 정말."


 "근데, 나는 네가 이걸 지금 막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너무 좋아. 너 첫날 완전 가시가 잔뜩 돋아가지고 너무 공격적이었는데, 기억해? 지금 이렇게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야. 우다라에서 삼일이면 되는 거였니? 정말 애가 얼굴색 바뀐 것좀 봐."

 

 쉼이 필요해서 찾은 우다라에서, 우리는 서로의 쉼을 목격하고 함께 쉴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해주고 있었다. 이런 일은 계획한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 '서로의 사랑을 끌어당긴 것'으로 결론지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내 인생에 나타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 언제나 내 여행은 '뭘 봤는지'보다 '누굴 만나 뭘 나눴는지'가 남는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한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근데 우리 그룹을 만든건 A 너잖아. 이 모든 영광을 난 A에게 돌려. 니가 날 그 큰 테이블로 불러 앉히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부끄러움 많은 한국인' 연기하면서 혼자 책읽으면서 밥먹고 있었을걸. A 만세!"

 "근데, A 너. 직업이 뭐야?"

 "HR."

 "푸하하하하하. 너 정말 좋은 자리를 만든 다음 사람들을 리크루팅 하고 있었던 거구나!"

 "누군가는 천직을 얻긴 얻었네."


 <발리 스파이시 버즈> 그룹챗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인연들이 얼마나 갈지, 꼭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라진 않는다. 서로를 가끔씩 추억하고 그 때 나눴던 대화들이 갑자기 떠오르곤 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잊고 바쁘게 지내는 그 날까지라도 자주 대화를 주고 받기로 했다. 스파이스 걸즈 아니고, 스파이시 버즈로. 어디서 어떻게 온 그룹명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직도 매일 대화가 아이진다. 오늘은 어떤 명상을 시도해 봤는지, 오늘 어떤 생강이 떠올랐는지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언제나 누군가 이 문장을 던지면 시작한다.


"말해봐. 오늘 하루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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