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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Mar 25. 2022

역사의 천사는 여전한가?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7-택시(자파르 파나히, 2015)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

엄마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야 택시를 타봤는데, 그것도 아빠의 주도 하에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학령기 이전, 엄마 손만 잡고 다니던 시기에 나와 동생은 버스와 전철만 탔었다. 엄마는 아꼈던 거다. 모든 일에 허리띠를 조이며 살진 않아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아낄 수 있는 건 아끼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택시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난 자가용과 택시를 구분하지 못했다. 운전하는 사람이나, 그 안에 타고 내리는 사람이나 그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알것 같았는데 그 기준이 뭘지, 어떤걸로 택시와 자가용을 판단하는지. 아니, 자가용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에 내 머릿속에 개인이 차를 소유해서 타고 다닌다는 것은 없는 개념이었던 것 같다. 고정된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가 개인의 자유와 욕구를 반영하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면 모든 것이 대중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낯모르는 익명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노출되는 것이었다. 버스나 택시를 타는 것도 내게는 그런 의미였다. 이 숫기 없음의 초 민감함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부담감이라니. 그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도로와 인적 드문 골목길조차 나만의 길은, 당연히 아닌 것이고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귀와 눈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마음껏 쓰고 그 안에서 원하는 음악도 듣고, 먹고 싶은 것도 사서 먹으면서 담배도 피우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개인 차라니. 선망과 질투를 느꼈고, 그 자체로 내게는 별세계였다. 


 밖에서 볼 때와 같이 그 안은 정말 별세계였다. 안락하고 조용하며 기분 좋은 냄새도 났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더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작은 깜박임과 한숨조차도 그 안에서는 다 포착이 될 것 같아서 편히 앉고도 자세는 굳기 일쑤였다. 비용을 지불했다고 해도 그것은 남의 차니까. 내게는 모든 차가 다 남의 차니까 그것이 더 작고, 더 개인적일수록 그 안에서 나는 나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택시 안에서는 운전자와 탑승자 사이의 거래 조건이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지켜진다. 지금은 없어진 합승이 있었지만 어쨌든 택시는 나처럼 숫기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치른 비용으로 보장되는 것을 모두 즐기면서 프라이빗하게 목적지까지 갈수가 있다. 고로 택시는 여러 유형의 교통수단 중 가장 비정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택시도 있다

어떤 영화는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내력을 필수적으로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자파르 파나히의 2015년 작 <택시>가 그런 작품이다. 그는 영화와 직접적인 행동으로 정권을 비판하고, 이슬람의 권위를 공격하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재판, 수감되는 중에 20년 간 출국과 영화 제작 금지까지 선고받았다. <택시>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 중 하나다. 그와 같은 이란 출신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제목을 비틀어 차용하자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영화는 계속된다"(「그리고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 1991년 작).


 다큐멘터리 필름의 형식을 취한 이 영화 속에서 자파르 파나히 본인은 택시 기사다. 우리 나라로 치면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같은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택시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그 안에는 소형 카메라가 한대 설치돼 있고, 거기에 승객들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돌아다니는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 안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사형제를 두고 언쟁하는 두 남녀, 불법 DVD 소매상,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남자와 그의 아내, 어항을 들고 다니는 두 할머니, 자파르 파나히의 조카, 그의 오랜 친구, 쓰레기통을 뒤지고 폐품을 모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아이, 인권 변호사 그리고 젊은 노상 강도 둘이다.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대의 택시가 이란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창구가 된다는 점에서 자파르 파나히 기사님의 택시는 그것 자체로 카메라다. 이 영화엔 두 대의 카메라가 딱 붙어서 동시에 작동하는 셈이다. 택시라는 내적인 카메라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차량 안에 설치한 외적 카메라. 이 영화가 있는 그대로의 이란을 가공이나 연출 없이 보여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DVD 판매상처럼 "지금 영화 찍는거예요? 방금 내린 저 사람들도 배우죠?"라고 의심하는 심정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허구가 사실보다 진실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오래된 진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염두한다면 이것이 다큐멘터리이든 모큐멘터리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택시는 감독 본인의 의지의 표현물이다. 그곳은 테에란 시내를 종횡하며 다니는 작은 광장이다. 영화 속의 택시는 내가 알던 것과 다른 택시다. 낯선 이들의 말이 뒤섞이고 거기서 갈등이 파생하며, 은연중에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된다. 


영리하고 재빠르게, 빈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파고드는 영화 만들기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면, 그건 권력의 탄압에 맞서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감독의 의지가 빚어낸 기적같은 사회 초상의 필름에 대한 낭만적인 선망이 무너지는 것에 실망했기 때문일까? 이 영화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런 사회적 조건안에서 이런 주제의식의 영화가 완성됐다는 것이 가진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영화 제작과 관련해서 자파르 파나히는 불굴의 투사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영리하게 되받아치며 질문하게 만드는 트릭스터의 모습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영화 연출 과제를 해야 하는 조카의 장면에 있다. 


 학교에서 내준 영화 제작 과제를 해야 하는 조카는 삼촌과 리얼리즘 논쟁에 들어간다. 이른바 '추악한 리얼리즘'의 문제. 초등학생인 조카에게 리얼리즘은 어려운 주제이지만 리얼리즘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삼촌은 조카가 학교에서 받아와 낭독하는 좋은 영화 제작의 조건(이른바 남성 본위의 보수적 이슬람 주의에 푹 절은 영화 제작 십계명)을 낭독한다. 


이슬람 두건을 준수하라.
남녀의 접촉을 삼가라.
추악한 리얼리즘을 피하라.
폭력을 피하라. 
좋은 사람한테는 넥타이 사용을 피하라. 
좋은 사람한테는 이란 이름을 쓰지 마라.
대신 이슬람 성인들의 신성한 이름을 붙여라. 


 여기서 좋은 영화란 배급이 가능한 영화다. 유통될 수 있고, 관객들에게 공히 보여줄 수 있는 영화.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국가-기관-지배자-권력집단'이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예찬하지만 '추악한 리얼리즘'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잘못 보게 하고, 반사회적인 사상을 주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정리한 추악한 리얼리즘의 정체다. 불법 DVD 판매상이 감독을 동업자로 속이고 호객 행위를 할 때도 그랬고, 두 할머니가 그의 매너를 두고 불평을 할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자파르 파나히의 얼굴은 굳지만 이건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적어도 이 표정은, 그것이 연출된 상황이라고 해도 엄연히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연출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극적으로 거기에 몰입하여 생긴 진실된 표정이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정치적 인간이 광장에서 발언하기 위해서는 다분히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발언 또는 행동이 정치적으로 더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그것은 꾀, 영리함, 아이디어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트릭스터적 자아가 적극 개입한 영리함이 번뜩이는 영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은 별스런 영특함이 아니다. 택시라는 공간이 이 영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볼 때, 그것이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택시의 사적 공간으로의 정체성은 나의 일방적인 이해일 뿐이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택시 또한 매우 정치적인 곳 아닌가. 택시를 타면 기사님이 틀어놓은 뉴스, 거기에 대한 기사의 논평만 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는 비사회적 개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그 어디나 충분히 정치적이다. 거기서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거기 있을 뿐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그런 택시 본연의 정치성을 영화적 무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지금, 여기에'서 휙 잡아채기

발터 벤야민은 그의 후기 대표 논문인 <역할 철학 테제>(또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역사의 진정한 이미지는 단숨에 '휙' 지나가버린다고 했다.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기에 모든 순간이 기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을 역사적 진리의 순간적 이미지들이 지금 막 당신의 옆으로 휙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요한 건 감식안일까? 깨우침의 보편적 정언명령. "눈을 떠라!".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_<역사 철학 테제> 9번 테제, 반성완 역


 정치적 박해 속에서 망명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거나 미루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든 짧든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 인해 발생한 삶의 한숨과 비탄을 좀더 보려고 한다. 완벽한 절망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발아할 수 있는가?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마땅히,라고 말하거나 그럴수도,라고 어떻게든 붙잡아보려는 마음조차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 질문에 적합한 답은 없는 것만 같다. 단순히 물리적 세계로 치환한다면 고통이 있을 뿐이다. 고통은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마음먹기 따름이라며 마음 수련을 운운하는 것은 진정성은 있을지언정 그것을 말하고 실천하는 자리는 앞서 던진 질문이 밝히게 될 영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카메라는 여기서 그 본연의 정치성을 회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를 대신해 말을 한다. 모든 영화적 기적은 본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는 데 있는데, 최악의 프로덕션 디자인 속에서 탄생한 자파르 파나히의 이 영화에서도 그런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 속에서 버티고 인내하며 쌓인 내면의 독은 암(癌)이 된다. 그때의 암은 이제 내 문제가 된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꿈과 두려움 사이에서 지금, 여기에 충분히 머물며 기다리기 위해, 그래서 쌓여 독이 될 수 있는 것이 흘러 약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에겐 영화가 필요하다.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의 마지막 장면은 순응하는 영화들에 대한 조화이자 새로 시작되는 영화들에 대한 축하의 의미를 모두 담은 한 송이 장미꽃으로 끝난다. 그 빨간 장미가 올려지는 것으로 낡은 택시의 대시보드는 제단으로 변모한다.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조카의 비밀 영화 연출 상황을 알게되다

내가 택시에서 내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데리고 있는 조카에게 일이 하나 생겼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리고 나온 신혼부부가 운전사에게 팁을 주는 와중에 지폐 한장을 떨어뜨렸는데 둘 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다가오던 포대기를 맨 남자아이가 그걸 보고 슬쩍 주웠다. 아이는 '횡재다!' 싶었겠지. 누가 볼까봐 운동화 끈이 풀린 것처럼 쪼그리고 앉아 재빨리 돈을 줍는걸 조카가 카메라에 다 담았다. 조카는 그녀와 또래로 보이는 아이를 부른다. "그 돈을 돌려주라"고. 아이는 거절한다. 조카는 눈물까지 흘리며 사정한다. "네가 그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내 영화가 완벽해지지 않아. 제발 부탁이야". 조카의 사정에 마음이 흔들린 아이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지만, 직접 돈을 돌려줬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겁이 났는지 아직 차에 타지 않은 신랑 근처에 돈을 떨어뜨린다. 신랑은 여전히 모르고, 결국 아이는 그 돈을 주워 신랑 뒤에서 머뭇거린다. "빨리 줘. 얼른 줘."라고 속삭이는 소리로 간절이 외치는 조카. 카메라는 그녀가 기대하는 감동의 순간을 담기 위해 팔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조카는 핏줄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성별의 아이다. 가족과 가문, 핏줄, DNA 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평화로운 집안에서 혁명가가 나올 수도 있고, 운동에서 두각을 주로 나타내던 부모 아래서 뉴튼이 나올 수도 있는 거다. 항상 변칙은 있다. 조카는 나와 같이 영화를 아끼고, 좋은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직 이 아이에게 영화란 규범에 맞게, 국가적 이념이나 보수적 도덕관에 맞춰 우뚝 설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감독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아이는 지금 그런 열의에 차 있다. 이 아이가 계속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앞으로 삼촌이 왜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했는지를 알게 될까? 아직은 정부 당국이 제시하는 이념에 충실한 아이는 나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른이 됐을 땐 내 반대편에 서 있을까, 아니면 나와 같은 라인에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며 투쟁하며 영화를 만들까?


 내가 없는 사이에 조카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 장면-꿈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지만 내가 아직 잘 모르는 일을 말하고 있다. 내 의식이 보지 못하는, 내 의식이 비어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나의 자아가 어떻게 세상을 배우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카메라는 순수한 눈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순수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 같지만, 그 뒤에서 어떤 지시와 취사 선택이 있는지를 카메라에 담긴 것만 통해서는 다 알 수가 없다. 도덕적 올바름을 가르치는 교훈극에 심취해 있는 사랑스럽지만, 앞날이 걱정스러운 조카가 아이러니가 가득한 비정한 현실에 눈 뜨고 거기에서 자기 입지를 단단히 잡을 수 있도록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옳지 않다'고 가르쳐야 할까?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이 아이도 한 명의 사람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데. 내 방법은 하나다. 하나하나 따져서 가르치려고 들지 말고 내 택시에 태워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 된다. 택시의 창문이 나의 카메라가 되어 아이에게 세상을 더 골고루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할 것이다. 그렇게 보고 느끼면서 아이는 학교 교육과 마주한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 속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결국은 마음을 따라 선택하겠지. 


 지금까지의 정리와 반대로 이건 또 하나, 나를 향한 직접적인 질타가 된다. 이게 정말 내 꿈이라면 이 아이의 모습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일텐데. 조카는 내게 있는 미숙한 부분, 은근히 자기 생각을 강요하며 타인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공감할 여유가 없는) 이기적인 모습을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은, 정말 나도 모르게 내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내 뜻대로 하려고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꿈-장면이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없어서 지금껏 몰랐지만 이번엔 다르다. 카메라가 그 안에 남아서 그 상황을 다 찍어놨으니까. 그것이 꼭 꿈같다. 평소엔 내가 몰랐던 내 미숙하고 고집스런 행동을 무의식이 꿈 필름에 잘 담아뒀다가 때가 되니 내게 보여줬다. 


 내가 한 행위가 어느 순간 낯선 한 편의 필름으로 내 앞에서 상영된다. 

영화라는 선물, 영화라는 기적! 그 이전에 영화라는 노동. 글을 닫으며. 

꿈에서 만난 개미 친구가 생각난다. 노동의 기쁨과 도전의 희열을 몸소 보여준 나의 개미 친구는 몸은 작았지만 의지는 살아있었고 욕심 부리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날 그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 일을하며 한걸음씩 나아가는 친구였다. 나는 지근거리에서 그의 사흘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땀을 흘렸다.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기적은, 선물은 그것이 무상인 것 같지만 임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쌓아올린 땀의 결과물이 그것을 웃도는 보상으로 내가 쓰고 투자한 시간에 대한 비논리적이고 초월적인 길을 통해 다가온 정당한 유상의 결과물인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가 빛나는 순간을 선물로 선사하는 기적처럼 경험된다면 그것은 시대의 따가움에 눈을 감지 않고 계속 손을 움직이며 영화-일을 해온 한 사람의 예술가가 묵묵히 자기 분량의 땅을 갈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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