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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라 꽃목수 Apr 24. 2021

앞으로도 우린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테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참 서투르고 미숙하다.

ⓒ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첼로 켜는 학생이 나온다. 그는 매번 같은 부분에서 실수를 한다. 도무지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의 연주가 아름답게, 완전하게 나오는 건 10년이 지나 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인공 준세이와 아오이가 서투른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다 10년 만에 재결합하는 것처럼.



비가 오는 9월의 어느 날, 우린 연인들의 성지라는 피렌체 두오모에 올랐다.

서정적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피렌체의 골목들을 지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두오모'를 마주했을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피렌체에 오기 전 스위스에서 둘 다 물갈이를 심각하게 했던 터라 우리의 장과 항문이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피렌체 두오모 꼭대기까지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장 트라볼타 상태로 중간에 화장실 마려우면 어쩌지..라는 엄청난 두려움과 부담감을 안고 463개 계단을 올랐다.

두오모 꼭대기에서 바라본 피렌체 시내 전경


내 서른 살 생일엔
두오모에 같이 가줘.

- '냉정과 열정 사이', 아오이


응, 약속할게.

- '냉정과 열정 사이', 준세이



두오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던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두오모에 왔다는 게 정말 가슴 벅찼다. 나 혼자 피렌체에 왔다면 이렇게까지 아름다웠을까? 우린 '냉정과 열정 사이' OST를 들으며 피렌체 거리를 걸었고, 밤이 깊도록 두오모 근처에 머물렀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두오모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책으로 읽은 건 스무 살 때였다. 지금 다시 읽으면 한없이 유치해 보이겠지만, 그땐 준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이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면 나도 어른스러운 사랑을 할 줄 알았다.

The Spring(원제: Primavera), Sandro Botticelli, 1478,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우피치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작품,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1478)」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아프로디테가 된 것 마냥 온 세상이 꽃밭이자 '봄'일 줄 알았다. 이탈리아어로 '프리마베라(Primavera)', '봄(The spring). 작품 안에 있는 200여 종의 꽃은 실제 피렌체에서 자라는 꽃들이다. 피렌체에 대한 보티첼리의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스무 살, 어른이 되면 머리 위에서 에로스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삼미신과 꽃무늬 드레스 입은 플로라마저 축복하는 그런 사랑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Bacchus, Caravaggio, 1596,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현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친구들과 술 마시느라 방탕한 생활을 했고, 사랑에 빠지기보다 술독에 빠져 헤엄치는 걸 즐겼다. (바쿠스의 얼굴로 카라바조 본인의 얼굴을 그렸다는 게 정설인데, 우피치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볼 때 나는 20대 내 모습이 이입됐다.)

Medusa, Caravaggio, 1597,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현실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어른스러운 연애는 없었다. 사랑은 마냥 아름답지 않았다. 유치하고, 힘들고, 나를 지치게 하는 연애 앞에서 나는 메두사가 됐다. 아프로디테가 되기는커녕 아테나의 저주에 걸려 머리카락이 뱀으로 변하고 보는 사람들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


어른스러운 사랑을 할 줄 알았던 20대의 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했다.




10년이면 첼로 연주도 완벽해지고, 영화 속 주인공도 성숙한 사랑을 하던데 스무 살 하고도 10년, 이후로 몇 번의 봄을 더 지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 앞에선 철부지다.


그리고 20대의 어느 날, 나무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6년의 시간을 보내고, 우린 함께 피렌체 두오모에 올랐다.


※주의: 신혼여행 아니다

기베르티가 27년간 제작한 '천국의 문', 피렌체 두오모와 마주 보고 있고, 실외에 있는 건 가품이다. 진품은 피렌체 오페라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그를 만나고 사랑한 순간부터 나는 바쿠스나 메두사의 모습을 벗고 있다. 그가 나를 천국의 문으로 인도?했기에...


※주의: 우린 둘 다 무교다


여전히 나는 서투르고 미숙하다. 하지만 지금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또 넘어지길 반복하며 내 세상만큼은 좀 더 단단해져 그를 만날 준비를 했나 보다. 인연을 맺는다는 건 네 세상과 내 세상이 만난다는 의미라던데.



함께 할 긴 여정에서

어쩌면 우린 계속 미숙하고

앞으로도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테지만,



언젠가 가을비 내리는 날
또 한 번 같이 피렌체 두오모에 가자.


응, 약속할게.



목수에게 영감 받고

woodith가 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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