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 육아 일기
부모님과 살고 있는 ‘어쩌다 보니 솔로’인 남동생과의 통화.
남동생 : tv 고장 나서 바꾸려고 하는데...
나 : 갑자기 tv가 왜 고장 나?
남동생 : 화면이 흔들려서 AS 불렀더니
사용 시간이 3만 시간이 넘었다고.
많이 보셨네요 하던데?
나 : 뭐? 3만 시간?
부모님네 TV는 2014년도 모델이라고 하니 만 8년 정도 된 셈이다. 나는 TV, 냉장고, 세탁기 같은 대형가전은 기본 수명을 10년 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8년 만에 사망한 TV라면 내 기준에선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타까운 경우다.
남동생의 고민은 몇 인치짜리 TV를 살 것이냐였다. 요즘 대세는 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TV라나 뭐라나. 나는 엄마 집의 아담한 거실을 떠올리며 TV가 놓일 벽의 크기, TV와 소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너무 큰 TV는 부담스럽지 않겠냐고 했다. 당장이라도 70~80인치짜리 TV를 결제할 기세였던 남동생은 내 말을 듣더니 조금 진정했다. 스마트 TV의 최신 기능들이 부모님에겐 무용지물이라는 걸 감안해 적당한 크기의 가성비 좋은 모델을 알아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남동생과 통화를 하면서도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건 ‘3만 시간’이었다. 3만 시간이라니, 가늠해본 적도 없는 시간의 단위를 듣고 멍해졌다. 나의 뇌는 어떻게든 손에 잡히는 단위로 환산해보려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성공의 조건으로 이슈가 되었던 ‘1만 시간의 법칙‘이 먼저 떠올랐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개념이었는데, 1만 시간을 채우려면 매일 3시간씩 10년 또는 매일 10시간씩 해도 3년이 걸린다. 그런데 엄마가 8년이 넘는 동안 TV를 본 시간은 자그마치 3만 시간이다. 결국 나는 스마트폰의 계산기를 켰다. 3만 시간을 24시간으로 나눴더니 1,250일!! 천일이 넘는다. 엄마는 하루에 몇 시간 TV를 보신 걸까? 3만 시간을 8년으로 나누고, 다시 365일로 나눴다. 일 평균 10시간이었다.
평소에도 엄마 집에 가면 늘 TV가 켜져 있었다. 실내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을 때면 TV는 필수였다. 딸과 사위, 손자가 방문을 해도 엄마는 식사 준비를 하면서 TV를 켜놓으셨다. 화면을 보지 않을 때도 자주 있지만 그럴 때는 TV소리가 라디오처럼 엄마 집의 배경음으로 깔려있었다. 가끔 엄마에게 전화를 걸 일이 있어서 뭐하고 계셨냐고 물으면 ’ 텔레비전 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웃이나 친구를 만나러 외출하실 때도 있지만 잦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코로나19로 그나마 있던 모임도 줄어들어 지난 2년 동안 엄마의 TV 시청 시간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운동도 실내 자전거 타는 것으로 대신하는 엄마.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집순이였구나!! 나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였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엄마의 특성을 생각해보거나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 엄마를 ‘집순이’라고 정의하고 나니, 나와 상관없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문득 ‘57년생 여성‘으로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떠올려봐도 아는 것이 없다. 엄마는 나와 연결된 기억 속에서 엄마의 역할로만 있을 뿐, 따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나에겐 이름 없는 존재였다.
남편과 아들이 출근하고 혼자 남은 집에서 유일하게 엄마에게 말을 들려주는 존재였을 텔레비전. 오전 시간, 청소와 집안 정리를 마친 엄마가 소파에 앉는다. 난방비를 아끼는 게 몸에 밴 엄마는 바닥에는 전기장판을 깔고, 소파엔 항상 담요를 준비해 둔다. 소파에 올라앉아 담요를 덮은 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이미 대부분의 드라마를 재방송까지 훑었으니 볼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집요하게 채널을 눌러보던 엄마는 홈쇼핑 채널에서 멈춘다. 프라이팬과 냄비까지 5종 세트라는 푸짐한 사은품과 12개월 무이자 할부, 마감 임박을 외치는 쇼호스트의 열정적인 외침에 전화기를 들었나 놨다를 반복하는 엄마. 며칠 뒤 택배 상자를 발견한 아들의 폭풍 잔소리를 상상하며 몸서리를 친 엄마는 전화기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통신판매의 유혹을 어렵사리 이겨내고 조금 무기력해진 엄마는 까무룩 잠이 든다.
문득 가슴이 아려왔다. 혹시 엄마가 외로웠으면 어쩌지. 마치 ‘3만 시간‘이 엄마의 외로움을 대변해주는 데이터 같아서. 내가 엄마를 외롭게 방치한 것 같아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홀로 텔레비전 앞에 있었을 엄마의 쓸쓸한 일상이 떠올랐다.
나 : 엄마, 새 텔레비전 마음에 들어요?
엄마 : 응 텔레비전이 얼마나 큰지
조금만 더 큰 거 샀으면
(TV 장식장에) 올려놓지도 못할 뻔했다.
엄마는 더 커진 텔레비전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는데, 기쁨보다는 새 텔레비전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남동생과 아빠가 합세해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또 TV를 본다 둥, 맨날 TV만 본다 둥. 끊임없는 부자의 잔소리에 빈정이 상한 엄마는 다 부셔치우라고 했단다.
“세탁기 돌리고 TV 보다가
(세탁) 끝나면 가서 널고.
다 널고 나면 TV 보고 그러는 거지.
그거 말고 집에 있는 사람이
뭐할 게 있나?
다들 안 그러나?”
억울한 심정을 가득 담아 나에게 하소연을 하신다. 보통 아들이 잔소리가 심했는데 이번엔 남편까지 가세해 공격하니 혼자 궁지에 몰린 것 같아 속이 많이 상하신 모양이었다. 남동생한테 TV가 고장 난 이유를 들었을 때는 엄마가 좀 심하신가 했지만, 생각해보면 외출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환갑이 한참 넘은 나이,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돌보거나 특별한 취미가 있지도 않은 엄마. 집안일의 빈틈을 채워주며 엄마에게 계속 말을 들려주는 것은 텔레비전뿐이다.
엄마는 TV를 열심히 보신다. 특히 드라마와 홈쇼핑을 좋아하지만 뉴스도 꽤 집중해서 보신다. 딸과 사위를 만나면 뉴스에서 봤던 최근 소식을 열심히 늘어놓으신다. 용어도 자주 틀리고 정작 중요한 지명이나 이름은 도중에 잊어버려 ’ 아이고 뭐였더라? 입에서 뱅뱅 도는데 기억이 안 나네.‘라며 스무고개를 하듯 도움을 받아 문장을 완성하시면서도, 엄마는 꿋꿋하게 ’ 나도 이 정도는 안다 ‘는 교양을 뽐내신다. 신문이나 책은 전혀 보지 않는 우리 엄마. 대통령이 바뀐 소식, 노인 정책과 연금의 변화, 전기세 인상 등 새로운 소식을 모두 TV를 통해 공부하신다. TV는 엄마에게 최소한의 생활 정보와 지식을 공급해주는 교양의 출처다. 그런 엄마에게 TV를 그만 보라는 건 세상과 의절하라는 뜻이다. 이런 불효 막심한 자식들을 봤나.
예전에는 엄마에게 ’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걷기라도 해라, 뭐라도 배워봐라, 친구들을 더 만나라’라며 엄마 입장에서 보면 같잖은 잔소리만 늘어놓는 딸이었다. 얼마 전, 통화로 나의 지겨운 레퍼토리를 듣던 엄마가 하품을 했다.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겠지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 아들한테도 안 하는 잔소리를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쏟아내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나한테 했던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이젠 상황이 역전되어 내가 엄마한테 하고 있었다니. 결혼을 하고 14년이 되었건만 오랜 세월 함께 살며 겪었던 엄마와의 묵은 감정과 기억들은 해결되지 않고 쌓여있다. 40대가 되니 가끔 선명한 사진처럼 서운했던 순간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 애증의 감정들을 숨긴 채 착한 딸인 척, 약해진 엄마를 아이 취급하며 내가 야단을 치고 있었다.
이제라도 엄마를 나와 독립된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40년이 넘도록 이어진 ‘엄마 역할’은 졸업시켜드리고, 집과 TV를 좋아하며 나와 가장 가까운 여성인 김영자 여사로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해야겠다. 친애하는 나의 김여사.
나 : 엄마, tv 실컷 보셔. 엄마가 본다는데
뭐 어쩔 거야.
엄마 : 안 봐!
치사하고 드러워서 내가 안 본다.
나 : 내가 아빠하고 00(남동생)한테
그런 잔소리 하지 말라고 할게요.
같이 놀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TV도 못 보게 하는 게 말이 돼?
진짜 웃기는 부자야~
엄마 : 하하하하하
며칠 후, 엄마 편이 되어 통쾌하게 남편과 아들의 뒷담화를 대신해주는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정말 크고 시원하게 웃으셨다. 내 아들이 정말 기분 좋을 때 내는 웃음소리와 닮아있었다. 결국 ‘엄마, 미안해’라는 말은 우물쭈물 삼켜버리고 엄마랑 신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