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흔한 돌과 이끼가 주인공이 된 생태정원
제주는 돌, 바람, 바다로 둘러쌓여있다. 특히 돌과 바람은 나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센 날이 흔하기 때문에 땅에서 가장 흔한 돌로 담을 쌓아 막는다. 하지만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돌은 방해가 될 뿐이다. 흙을 파다가 돌이 나오면 캐서 옆쪽에 던져 버린다. 이렇게 쌓인 돌은 돌담이 되기도, 방치되기도 한다.
방치되어 있던 흔한 돌무더기에서 정원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 '제주 베케'의 시작이었다. 베케는 돌무더기가 쌓여 언덕처럼 형성된 것을 부르는 제주 방언이다. 표준어에서 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제주에서 돌무더기가 쌓인 것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베케를 만든 정원사, 김봉찬 대표는 돌무더기의 뒤쪽 그림자에 감춰진 이끼를 보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 곳에 나의 정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이끼와 나무, 고사리과 식물들 사이로 회색 건물이 자리잡아있다. 어두운 현무암 돌무더기처럼 베케의 외관도 어두운 빛을 띄고 있다. 자연과 공존하는 베케의 철학처럼 사람의 건물도 정원과 어울리게 되어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큰 창과 함께 작품같은 공간이 열린다. 베케 정원의 아름다운 서사를 알리는 공간이다. 우드 톤의 테이블과 어두운 계열의 창틀 밖으로 이끼 정원이 보인다. 어두운 초록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창 바로 앞에서 보다가 조금 물러나 전체 모습을 봤다. 넓게 보니 이끼를 둘러싼 다른 식물과 조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왜 건물 공간이 어둡게 설정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정원과의 조화, 감상하기 위한 적절한 감도일 거라 느껴졌다.
건물을 나서서 좁은 길을 따라 정원으로 향한다. 어느 길은 나무 테크로 되어있거나 돌로 구획이 나눠져 있기도 하다. 어느 구간은 식물이 뻗어나와 있는 흙길을 따라 걷기도 한다. 저마다 매력을 느끼며 다양한 꽃과 풀의 풍경을 감상한다.
베케의 정원은 각자의 쓸모에 맞게 채워진 공간이다. 계단 밑 공간에는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 자리잡아 있다. 비슷하게 나무가 많아 그늘진 곳에는 이끼를 비롯해 다습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 살고, 해가 잘 드는 곳에는 비교적 햇빛이 많이 필요한 수국이 자리잡아 있다. 서로를 보완해주며 어울리는 꽃과 풀이 함께 자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건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정원 안에서 하나의 풍경이 된 듯이 잠깐 멈춰본다. 정원 사이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놓여있다. 특별히 셋팅되었거나 화려하게 꾸며져있지 않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도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우리의 머물 공간이 비어있다. 나무는 제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우리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꽃은 아름다운 감상거리가 되어준다. 베테랑 정원가의 탁월한 감각과 많은 이들의 땀과 도움, 무엇보다 자연과 공존하는 모양이 담긴 공간 '베케'였다.
베케는 정원의 공간을 확장해 2024년 5월 재개관 했다고 한다. 사전예약제로 입장 가능하며 식물 관련 프로그램도 추가되어 있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느낄 수 있는 정원, 제주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이 궁금하다면 방문해보길 권한다.
예약은 네이버예약으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