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읽고서
울리히의 본격적인 사고가 드러나는 2권을 관통하는 소재는 ‘정확성과 영혼의 세계 사무국’이다. 이는 봉건 귀족의 헤게모니를 대체해 가는 자본가, 근대 과학 정신에 녹아있는 합리성과 그에 대항하는 안티테제로서의 영혼(어렴풋이 의지)에 대한 것이다. 정확성은 당시 시대를 관통하는 자본과 젊은 문화의 핵심으로 느껴진다. 울리히 역시 이런 문화/정신적 시대정신에 따라 (직업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걸었다. 아른하임은 이런 정확성(이성적 합리성)의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늘 영혼을 기웃거리는 지식인이다. 합리적인 사업가이지만, 책을 쓰고, 시를 짓는, 이성의 토양을 딛고 있지만, 가슴은 감정으로 고동치고, 눈은 내면을 향하는 그런 시대의 완벽한 사람이고자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는 이성적 합리성의 수호자 일 수밖에 없다. 그 반대는 디오티마와 클라리세가 있다. 특히 클라리세는 풍부한 감성으로 외부의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풍성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클라리세의 감성과 영혼은 이성과 사고를 만나 의지로 폭발할 수 있는 실행력을 점점 갖춰나간다.
하지만 3권에서는 2권의 합리성과 영혼(의지)의 대립이 도덕과 선/악의 문제로 넘어온다. 인간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연결점은 있을 수 있지만, 이 부분에서 무질의 음악은 바늘이 튀었다. 3권의 대표 명제는 ‘도덕은 판타지다’라는 울리히의 선언이다. 이는 도덕에 대한 매우 도구적, 기능적인 접근으로 그동안 클라리세에 의해 노골적으로 대표되던 니체 철학이 울리히를 통해 드러난다. 니체 역시, 도덕의 기원을 ‘채무관계’에 두면서 강한 자에 대항하는 비열한 약한 자의 안으로 향하는 에너지(힘)가 만들어내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울리히에게 선과 악의 구분, 도덕은 지배계급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실체가 불 분명한 환상(판타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덕은 커다란 이념처럼, 사회적으로 군중을 끌고 가는 도구적 정신일뿐이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폭력에 정당성과 위로를 주었던 종교처럼.(이렇게 종교와 도덕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도덕의 문제는 울리히의 동생 아가테의 ‘유언장 수정’이라는 범죄행위를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특성 없는 남자]는 두 개의 층으로 되어있다. 개인의 심리 차원의 문제(합리성, 의지, 영혼)는 집단, 국가(카카니엔) 차원의 문제(사회구조, 정확성, 민족문제, 이념) 등과 같이 교차 서술된다. 이는 마치 니체 철학이 칼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확대되는 모양과 비슷하다. 무질의 문제 인식은 개인의 특성 없음을 넘어, 사회의 특성 없음으로 나가는 것이다. ‘평행운동’의 이념 찾기가 바로 개인의 영혼과 대비되는 사회적인 것이다. 이러한 서술구조는 읽는 이로 하여금 낙차를 만들고 이 낙차는 운율을 만들어서 소설은 시가 된다.
소설 읽기는 항상 다음 서사에 대한 예상을 불러오는데, 그곳엔 그동안의 개연성에 기반한 예상과 더불어 독자의 바람과 희망이 포함된다. 나의 부풀어 오르던 희망은 – 클라리세와 모스부르거의 만남, 울리히가 아가테의 범죄를 해결하는 방식 –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김이 빠져 버렸다. 갑자기 나의 머리를 꽉 채우던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밝은 연기는 순간 흩어져 버렸다. 성모 마리아와 심지어 신의 구원까지도 상상했던 클라리세의 모스부르거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그 보다 중요한 것은 클라리세가 정신 병동의 미친 사람들에 의해 약간의 무서움을 느끼는 지극히 평범한 상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변해가던 울리히는 아가테의 고민에 도덕적인 이야기, 심지어는 비난을 늘어놓았고, 굳건할 것 같던 담백한 의지주의자 아가테는 겨우 하가우어의 편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3권에서 멈추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하지만 [특성 없는 남자]는 미완성이다. 무질의 작업은 이제 3분의 2 지점에 선 것 같다. 모든 것은 제자리다. 하지만 이는 돌아온 나선의 한층 위에 선 것이다. 완성하지 못한 3분의 일은 아마 결론이 될 것이다. 다른 판본에는 유고 부분까지 실려 있다고 하는데, 문학동네 버전은 출간 부분에서 멈추었다. 유고 부분은 좀 다를까? 정신병동에 다녀온 후 클라리세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가테는 어떻게 자신의 범죄를 대할 것인가? 그 속에서 울리히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