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시리즈 1
우리는 기억으로 이루어질까? 기억이란 생물이 살아가며 남기는 로그이자 그 자체로 생물의 정신적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그 사건들은 기억이 된다. 기억은 다시 우리의 정신세계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기억은 끊임없이 기록되면서 우리를 바꾸고 또한 우리도 기억을 바꾸기도 한다. 기억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우리가 원하는 주관대로 기억을 가공해 저장하기도 한다. 과거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데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의식적 활동의 결과라는 말이다. 이렇게 기억은 우리를 구성하면서, 우리가 기억을 구성한다. 이 순환적인 구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기억이 인간을 바꾸고 인간이 기억을 바꾸는 과정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영화 세 편을 함께 보며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블루 재스민>, <애프터 양>, <이터널 선샤인>이다.
먼저 이야기할 영화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블루 재스민>이다. 이 제목의 Blue는 우울이라는 뜻을 담고 작품 내내 신경 쇠약을 겪는 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을 수식한다. 영화는 재스민이 비행기 옆자리의 승객과 대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남편과 처음 만날 때 '블루 문'이 나왔다는 이야기부터, 아주 사적인 취향 이야기까지 재스민은 옆 승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재스민이 너무나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해 승객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던 첫 시퀀스는 결국 재스민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며 급히 공항을 떠나는 승객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승객과 재스민이 초면이고, 초면인 사람에게 말을 늘어놓을 만큼 재스민이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진행과 함께 재스민의 기억을 거꾸로 더듬어가면서 관객은 점점 재스민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 그의 정신적 상태와 왜 그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뉴욕 사교계의 상류층에 위치하던 재스민은 남편과 헤어지며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 분)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그전의 부유하던 생활과 달리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 재스민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재스민의 현재와 재스민이 기억하는 과거가 교차되며 영화가 진행된다. 재스민의 혼잣말로 플래시백의 교차점이 이어지는데, 이 혼잣말은 재스민이 겪고 있는 신경 쇠약의 증상 중 하나다. 이 기억 회상 씬에서 부자 남편 '할'을 만나고,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사교계 상류층에서 완벽한 삶을 사는 재스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행복하게 지내던 재스민은 할이 사기 혐의로 FBI의 조사를 받고 교도소에 가면서 완전한 추락을 경험한다. 재스민의 아들 '대니'는 존경하던 기업인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가족을 떠나 연락이 두절된다. 그런 상황에서 재스민은 동생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관객에게 이 급격한 상황 변화의 전말에 대한 호기심을 주며 스토리는 나아간다. 재스민과 함께 기억의 조각을 맞추며 관객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빚을 떠안은 때에도 재스민은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와 택시 기사에게 많은 팁을 주기도 하며 여동생 진저에게서 어이없는 시선을 받는다. 사치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는 다시 상류층의 생활을 누리기 위해 다른 상류층 남자 '드와이트'를 찾고,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 드와이트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재스민의 거짓말은 결혼반지를 맞추러 간 보석상 앞에서 마주친 여동생의 전남편 '오기'와의 대화로 인해 모두 들통나게 되고, 재스민의 재혼은 무산된다. 희망을 품고 결혼반지를 사러 가던 재스민은 한순간에 길바닥에 홀로 남는다. 재기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당당한 얼굴과 절망에 빠진 재스민의 맨얼굴이 상승과 추락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기억의 재구성이 완성될수록 숨겨져 있던 반전이 드러나고, 영화는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드와이트와 싸운 후 차에서 내려 길을 헤매던 재스민은 우연히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들 '대니'를 만나게 된다. 사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 재스민에게 더 분노했다는 대니와의 대화로 모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할이 FBI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은 할의 외도 사실에 분노한 재스민이 그를 신고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할을 감옥에 집어넣고, 가족을 와해시킨 꼴이다.
작중 재스민의 이름 '재스민 프렌치'는 재스민이 만나는 남성들에게서 아름답고 특별한 이름이라는 평을 받으며 재스민이 그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는데, 사실 재스민의 본명은 평범한 이름인 자넷이고 재스민은 그녀 스스로 바꾸어 쓰는 이름이다. 이 가짜 이름은 지금까지 재스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불안정한 재스민에 대해 설명할 때 붙는 말은 '그녀는 약간의 신경 쇠약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신경쇠약은 전남편 '할'과의 이별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초반부에서는 왜 재스민이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말하는 화자로서의 재스민을 보여준다. 재스민이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만을 보여주는 영화 초반과 달리, 영화 말미에서는 재스민이 피하고 싶었던 진실과 다시 마주하게 되며, 모든 일이 본인 때문이라는 생각을 망각하고자 계속해서 기억을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신의 손으로 본인과 가족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자괴감이 재스민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대니를 만난 후 잊고자 했던 기억에 도달한 재스민은 진저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이 그곳에서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또다시 드와이트와 결혼하게 되어 집을 나간다는 거짓말을 하며 진저의 집을 나온다. 그렇게 '블루 재스민'은 공원의 벤치에 앉는다. 또다시 기억을 되돌려, 할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블루 문'에 대해 회상하면서.
처음 재스민이 혼자 기억하던 그녀의 기억들은 행복하고, 그녀 본위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재스민의 이야기는 재구성된다. 진저, 오기, 대니와의 충돌로 인해 드러나는 기억들은 그보단 조금 더 사실에 가깝다. 오기의 복권 당첨금을 할이 사기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재스민은 부정을 거듭한다. 재스민의 기억은 진저의 귀띔으로 할의 외도를 의심하는 시점부터 급격히 혼란스러워진다. 대니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재스민의 행동은 그녀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 회피하던 진실이다. 이런 기억들을 피하기 위한 과정에서 재스민은 혼잣말을 하고 멍하니 회상에 빠지는 등의 신경 쇠약 증세를 갖게 되었으나, 결국 진실로 또다시 돌아오게 되며 억지로 멀리했던 기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재스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기억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갈 곳 없이 혼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재스민이 기억 속을 헤매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블루 재스민>은 1947년 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재스민 캐릭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인상 깊다. 그 혼자 이 영화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도 <블루 재스민>에서의 케이트 블란쳇만큼 재스민을 제대로 연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행복한 추억을 회상하는 재스민의 꿈결 같은 표정부터 고통스러운 사실을 기억에서 꺼내는 혼란스러운 얼굴까지의 다양한 연기 폭이 관객의 감정 이입하게 만들며 재스민이라는 인물을 완벽히 설명한다.
우리는 기억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저장한다. 재스민도 마찬가지다. 그는 남편의 외도와 자신의 행동을 피하고 싶어 자꾸만 '블루 문'을 들었던 그때를 반추한다. 그러나 현실은 자꾸만 사실을 일깨워주고, 재스민은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시작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끝에 갇혀 계속해서 이 루프를 돌게 된다. 재스민이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거짓말도 들통나게 되지만, 기억을 가공하며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까지도 드러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재스민의 거짓말은 자신을 둘러싸는 갑옷이다. 아무것도 없는 재스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존심. 그리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까지 반복하는 방어 기제. 이 영화에서 재스민을 마냥 욕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재스민이 그다지 긍정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사랑에 빠져 대학마저 중퇴하고 할과 결혼한 그녀에게 할과의 결혼 생활은 인생의 전부였으며 이렇게 살아온 인생의 관성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들은 재스민의 생존 방법에 가깝다. 여기서 재스민에게 돌을 던지고 반면교사 삼기에는 재스민에 대한 안타까움을 무시할 수가 없다. 마지막 장면의 재스민은 공원에 혼자 남아 더 심한 정신증을 보이는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결말 후의 재스민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뉴욕 상류층의 맨얼굴, 도덕적 해이, 이런 거창한 얘기를 재스민의 인생에 갖다 댈 수도 있겠지만 단지 우리는 이 상류 여성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를 잔인하고 절망적인 방식으로 알게 된다.
재스민이 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주관에 따라 기억을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억을 가공한다. 이 부분에서 재스민의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재스민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기억의 원본에 도달한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가공된 기억이 아직 베일을 벗지 않은 채 뇌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기억과 현재를 교차해 보여줌으로써 재스민의 정신적 붕괴 과정에 공감을 이끌어낸다. 기억이 가진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솔직히 치과의사가 재스민에게 행하는 성추행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또한 성폭행 장면이 들어간다. 여성이 몰락하는 과정에 빠지지 않는 소재가 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재스민이 결혼 매물로서의 자신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회복을 꾀하게 하는 사회가 괜히 만들어졌을 리가. 다만 <블루 재스민>에 대해 쓰며 플래시백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으므로 말을 줄이는 게 낫겠다. 아래는 재스민이 할을 처음 만날 때 들었던 '블루 문'이다. 블루 재스민이 겪은 일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며 다음 영화를 재생하러 나간다.
https://youtu.be/cXj8c0rieNI?si=xMe9jhrPTwB1wI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