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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Jul 01. 2023

할 말 없는 영화 <헤어질 결심>, 정서경/박찬욱

인어공주 이야기 3

    


https://youtu.be/9Mz_cHble4 c



이번 영화는 최근 개봉 1주년을 맞이한 <헤어질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지금까지의 인어공주 중 가장 한국 사회에 잘 녹아 있다. 내가 선정한 세 편의 영화들의 주인공은 소개하는 순서대로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비단 송서래뿐만이 아니다. <헤어질 결심>은 한국 사회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로맨스 서사를 만들고 있다.




스토리를 만들 때 작가는 여러 가지 설정을 짠다. 여기서 배경 설정은 스토리를 전개할 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현실을 불러온다. 게임에서 배경 화질을 선택하는 과정 같은 일이다. 너무 높은 퀄리티의 화질을 선택하면 게임 플레이가 버벅거릴 때가 있다. 창작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적당한 해상도의 배경을 설정하고 나면 보통 스토리에 집중하는 편이 더 이롭다. 자칫하면 스토리의 전개보다 공들인 배경에 더 관심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독자가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런 균형을 공들여 맞춘다. 말하자면 필요한 부분만 설정하고 부수적인 부분은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쓰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의 강수량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런 무책임함은 소비자가 작품의 주요부에 초점을 맞추게 하기 위해 필요하며 창작자의 수고를 덜어준다. 즉 모든 설정은 창작자의 안배다.




박찬욱 감독이 다른 모 감독과 달리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를 비현실적일 정도로 소거하기 때문에 낮은 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반박하고 싶은데, 첫째로 영화가 꼭 사회 문제를 조명해야 할 의무는 없고, 둘째로 박찬욱 감독이 그러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측면이다(오히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문제들로부터 스토리의 발단이 시작된다). 사회 문제를 조명하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지만, 꼭 그래야만 좋은 작품이라는 건 아니다. 어떤 작품은 너무 고발에 집중해 오히려 프로파간다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서래를 의심하는 해준. 명대사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가 나온 씬이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상당히 높은 해상도로 현실이 보인다. 이 영화의 많은 설정은 현대 한국 사회를 과장 없이 심심하게 담고 있다.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며 원전 문제를 예민하게 해석한다. 해준과 정안의 자녀는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로 학교 기숙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서래는 매일 다른 독거노인의 집에 방문하는 간병인이다. 송서래는 외조부가 만주 조선해방군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주 정당성을 근거한다. 서래의 첫 번째 남편은 가정 폭력 가해자고 두 번째 남편은 금융 사기범이다. 해준과 서래는 때때로 번역기를 통해 대화한다. 이포의 형사 이수는 여자 형사라는 이유로 따돌림당한다.


이 문제들은 촘촘히 현실을 짜고 상황은 이 문제들에 부딪히며 계속해서 움직인다. 서래는 한국에 머무를 방법이 출입국관리소 공무원과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독거노인들은 철저히 고립된 환경에서 산다. 서래가 아니면 만나는 사람도 없다. 가정 폭력과 주식 사기 이야기는 길게 말할 것도 못 된다. '남초 직업군'의 여성 혐오는 숨 쉬듯 존재한다.

 

이런 영화에서 현실의 문제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소거됐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과하게 자연스러워서, 호들갑 떨지 않아서, 포커스를 하나에만 맞추지 않아서 감지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다. 물 속의 물고기가 자신 주변의 물을 굳이 의식하고 살아가겠는가? 물고기는 물의 부존재를 의식하지,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헤어질 결심>에서 그려진 상황은 높은 해상도의 현실이다. 굳이 어떤 부분을 과장하거나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에 현실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자연스럽다고 느낄만한 것은 현실과 달리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장센과, 사회 문제를 찾으려는-눈앞에 들이대주지 않기에-소비자의 새삼스러운 노력이다.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는 것은, 이 영화는 분명히 로맨스 장르라는 것이다. 사랑 얘기다. '그곳에 현실이 이렇게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해준과 서래는 이렇게 사랑을 했습니다' 같은 스탠스다. 언제까지 오래되고 압도적인 문제들에만 돋보기를 들이대야 좋은 영화라고 평을 받나? 주식 사기, 이민자 문제,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 워치, 원전의 안전성 문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여성 혐오 같은 현실이 여기 있다. 팔로업 좀 해야 된다.


해준의 사무실.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형사 개인실과 달리 자로 잰 듯 깔끔하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박은 안 예쁜 건 못 찍는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




인어 공주 이야기라고 해 놓고 서래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서래와 인어공주 얘기를 하자면 많은 단서를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언어적 장벽, '녹색으로 보였다 파랑으로 보였다'하는-인어공주의 비늘을 연상케 하는-원피스, 배의 밑바닥에 실려 온 타지인, 한국의 땅인 호미산을 밟고 싶어 하는 것, 출생지와 다른 땅의 드라마에서 배워 오는 사랑법, 결국 해준을 찌르지 못하고 바다에 던져져야 하는 임호신의 핸드폰 등. 이 인어 공주는 굉장히 로컬라이징 되어있고 또 현대적이다.


서래의 서사는 앞서 얘기했던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운디네>와 조금 비슷한 면이 있다. 크게 봤을 때 두 주인공 모두 첫 번째 남자에게 배신당해 살인을 하고, 두 번째 남자-남자 주인공-를 사랑하며 결국 그를 보내 주고 스스로 물 속으로 사라진다. <운디네>에서는 남자 주인공을 용서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거부라는 인어공주의 선택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헤어질 결심>에서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운명으로 들어가는 서래의 인간적 욕망을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인어공주 이야기를 비틀고 있다. 물론 두 이야기 모두 주인공의 희생으로 결말을 맺는다는 점은 기존 플롯과 동일하다. 다만 <헤어질 결심>에서는 혼자 남은 해준이 여생 동안 얼마나 서래를 찾는 불면에 시달릴지를 상상하게 된다는 점이 이야기를 연장시킨다. 밀물 때 바다를 헤매는 해준을 끝으로 페이드아웃 되는 영화를 보는 관객은 모두 서래의 목적이 실현되었음을 안다.









이 영화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기도 한 동시에 아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한 번 말하는 것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스스로 입을 다물게 된다는 얘기다. 또 내가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관객이 모든 단서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친절하고, 그만큼 훌륭한 영화다. 이 영화를 다각도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다. 내가 거기에 또 이 이상 사설을 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대학의 콘텐츠 수업 과제로 이 영화에 대해 쓸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주변인과 이 영화로 토론을 할 것이다. 나는 그냥 그런 장면들을 지켜보고 싶다. 이 영화가 어떤 문제를 조명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는 말도 흥미롭게 관전하긴 할 것이다. 이미 내가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이다. 반박 시 환영 그런 뜻이다.



이렇게 한 달 넘게 끌었던 인어공주 이야기 큐레이션이 끝났다. 모두 유명한 영화이긴 하지만, 아직 보지 않은 작품이 있다면 한 번쯤 관람하길 권한다. 이미 본 영화들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나눠주면 좋겠다.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영화평을 쓰고 있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 혹시 브런치 글을 읽고 이 영화들에 흥미가 생겼다면 정말로 기쁠 것이다.





https://youtu.be/GC_mV1Ipj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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