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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준맘 Jul 01. 2021

흉터

아이에서 엄마가 되었다

그날따라 짜증이 났다. 아침부터 컨디션은 이유 없이 바닥이었다.


"오빠, 나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몸도 안 좋고, 너무 가기가 싫다. 이상하네?"


남편은 웃었지만, 시가에 가기 전 나의 이런 반응 처음이었던 터라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들 사이 신이 난 둘째 아이는 방방 거리며 거실을 누볐다.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온몸을 던지던 그때. 시간을 돌리고 싶은 그때.


'내가 그 자리에 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상에서 떨어져 앉았더라면...'

'1분만 먼저 일어나 설거지를 했더라면...'


갖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뒤엉켜 오버랩되는 그 순간, 아이는 교자상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치고 자지러지게 울다.


평소에도 이곳저곳 잘 부딪치는 터라

"괜찮아, 괜찮아." 

등을 쓸어내리고 얼굴을 살피는데, 피가 흐른다.


눈과 눈썹 사이 1센티 정도의 벌어진 상처는 한눈에 봉합이 필요해 보였다. 몇 년 전에도 반대쪽 눈가가 비슷한 형태로 찢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필요한 약품을 사러 뛰어 나가고 나는 아이를 안정시키며 지혈을 했다. 경험이 있어서인지 전보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진정되었만, 문제는 주말 야간에 상처 봉합을 할 병원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얼굴이라 성형외과 선생님이 하셔야 할 텐데.. 봉합은 24시간 안에만 하면 돼요. 내일 개인병원으로 가세요."


3년 전, 보호자의 자격으로 응급실은 처음이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이를 안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냉랭한 말투로 하루를 더 기다리라 말하는 이들이 야속했다. 응급실에서 이 정도의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때 알게 되었다. 간단한 드레싱만 받고 다음날 개인병원에서 봉합을 했다.




일단 지혈은 되었으니 아이를 재우고 큰 병원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얼굴 부위 봉합은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24시간 안에 봉합을 하지 않으면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하니, 반드시 일요일 안으로 해야 했다. 벌어진 상처에 밴드만 붙이고 는 아이를 보는 엄마 마음 타들어갔다.


육아에 필요한 정보를 가장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곳은 지역 맘 카페다. 카페에 글을 올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몇 개의 병원이 공유되었고, 대기는 오래 하더라도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당직 선생님 출근 시간에 맞추어 분당에 있는 한 병원으로 갔다. 4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아이 잘 버텨주었다. 지루해하다가도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려 놀아주면 주변 사람에게 민망할 정도로 깔깔 웃었다. 코로나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꼼짝없이 대기의자에 있어야 했는데, 만약 아이가 버티지 못하면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꿰매는 수밖에 없었다. 고맙고 다행이었다.


수면 마취를 하고 봉합이 시작됐다.


신기한  화를 봐도 그러운 장면에선 눈을 질끈 감고, 내 몸에 난 상처에도 오만상을 찌푸리내가, 아이의 상처 꿰매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지켜았다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모니터를 수시로 체크고, 아이가 몸을 떨면 왜 그러는지 봉합중인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간호사가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나의 상태는 이상하리만치 안정적이었고, 보호자로 응급실에 갔던 첫 경험 때와는 많이 달져 있었다.

봉합을 마치고 깨기를 기다리며



집에 돌아와 퉁퉁 부은 눈으로 잠만 자는 아 얼굴을 보니 눈물이 터졌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았던 봉합 장면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상기되어 몸서리다.


엄마로서 강해졌다고 생각지만, 그래야만 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다가도, 아이를 잘 보지 못했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그러나 많은 엄마가 겪는 일들.

그 경험들이 나를,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나에게도 흉터가 하나 있다. 


내 아이와 비슷한 나이에 그네에서 떨어져 코에 생긴 흉터. 속이 다 보일 정도로 덜렁거리는 살을 떨리는 손으로 누르고 병원으로 내달렸을 내 부모의 마음을

이제서, 마흔이 다 되어서야 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같은 일을 겪고서야 안다.


며칠이 지나 아이도 나도 안정을 찾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아이의 흉터만이 아닌 의 흉터가 보인다.

어렸을 때 거울을 볼 때마다 거슬렸던 그 흉터가 제는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어느새

아이에서 엄마가 되었다.




실밥 풀 때까지 가정보육 중인 둘째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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