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추억
내 어린 시절의 고향집은 정말이지 드넓었다. ㄱ자 모양으로 이어진 안채, 사랑채, 넓은 마당, 그리고 대문 옆의 조그만 방까지 ㅁ자를 이뤘다. 대문옆의 그 방은 때로는 엄마의 곳간이 되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매일 상식(上食)을 차리는 제실이 되기도 했다.
우리 집은 송강 정철이 유배지로 삼았던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숲과 달이 어우러져 풍경이 아름다웠던 곳.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우린 송강 정철의 oo대손 문창공파다."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자주 하시던 이야기였는데, 그 덕에 지금도 그 말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조기교육의 무서움을 이제야 깨닫는다.
서까래와 대들보는 어찌나 크던지,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청마루 청소는 나의 몫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 모면 할머니 심부름과 넓디넓은 대청마루를 닦아놔야 했다. 매일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엉덩이를 한껏 치켜들고 마루를 반짝반짝 닦곤 했다.
할머니는 안방을 혼자 쓰셨다. 막내인 나는 유난히 예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심부름 담당이었다. 할머니의 방은 작은 방과 벽장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은 내게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었다. 벽장 속에는
유기 세트, 장롱, 그리고 조바위와 남바위 같은 전통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물건들이 손에 닿을 거리에 있는 게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벽장 깊숙한 곳에는 할머니가 애지중지 숨겨둔 간식도 있었다. 고모들이 사다 주신 곶감, 황도와 백도 깡통, 그리고 너무나 먹고 싶었던 노란 바나나.
가끔 언니들이 그것들을 몰래 훔쳐 먹다가 할머니에게 들켜 싸리비로 종아리를 맞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가을이 오면 집안은 더 바빠졌다. 매년 5대조 이상의 조상을 모시는 시제를 준비하기 위해 엄마는 한 달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엄마의 시제 음식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특히 청주와 육포는 모든 이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주악’이었다. 찹쌀로 만두처럼 빚어 기름에 지져낸 뒤 조청을 입히고 잣가루를 뿌린 주약은 달콤하면서 쫀득쫀득했다. 한입 베어 물 때의 그 감촉과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시제 날이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으로 모여들었다. 1박 2일 동안 차례상을 차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남자 어른들은 제기에 과일과 각종 제사 음식을 산처럼 쌓았다. 집안 가득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넘쳐났다. 엄마는 술도 잘 빚으셨는데, 시제를 지낸 후 남은 술찌꺼기로 막걸리를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마시곤 하셨다.
우리 집 뒤뜰은 과일나무와 꽃들로 가득했다. 주황빛 살구나무, 빨갛게 익는 앵두나무, 그리고 자두나무와
포도넝쿨. 그 사이에는 장독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엄마는 그곳에서 김치와 동치미 항아리를 관리하셨다.
봄이면 뒤뜰의 목단과 작약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엄마는 때때로 뒤뜰 한편에 있는 신주항아리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셨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큰아들의 무사를, 온 가족이 무탈을. 엄마의 기도는 항상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벽장에 간식을 숨기곤 했지만, 그 사실을 깜빡하셔서 곰팡이가 피도록 놔두시는 일이 잦았다.
언니들은 할머니 몰래 간식을 꺼내먹다가 들켜 싸리비로 맞곤 했다. 큰언니는 종종 할머니에게 말대답을 하다가 아빠한테 더 혼났다. 할머니는 엄마를 들들 볶으시는 말을 잘하시는 분이라 큰언니가 엄마 편을 들 때가 할머니를 제일 화나가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모들이 좋으면 서울 가서 살아요!"
큰언니는 날 선 말을 남기고 도망쳤고, 할머니는 싸리비를 들고 쫓아갔다가 숨이 차서 포기하곤 했다. 그런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린 시절의 고향집은 소란스럽고 정겨웠다. 대청마루 위를 뛰어다니던 발소리,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며 흥얼거리던 소리, 할머니의 꾸중과 언니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소리가 내 유년을 채웠다.
그 시절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오늘, 나는 가끔 그 풍경을 떠올린다. 그 속에서 뛰놀던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고, 그 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만큼은 여전히, 내 고향집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