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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앨리스 Dec 29. 2024

떡국만 보면 떠오르는 얼굴들

작은 언니 떡국 사건 

어린 시절의 설날, 그땐 구정이라 불렀던 날을 앞두고 우리 집은 늘 분주했다.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오가는 엄마의 발걸음 소리, 정미소에서 돌아온 하얀 가래떡의 윤기, 그리고 온 가족이 떡을 썰며 나누던 이야기들. 그 모든 풍경은 내 유년의 설날을 아름답게 채운 추억들이다.


그 시절, 나는 또래 친구들과 호호 손을 불면서 밖에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에 정신을 빼앗긴 채 뛰어다니다가도 멀리서 엄마가 커다란 가래떡 한 사라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하던 놀이를 멈추고 엄마에게 달려가곤 했다. 엄마의 손에서 갓 나온 가래떡은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 떡을 조청에 찍어 먹으면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이 참 좋았다. 또 그 가래떡이 딴딴하게 굳어지면 석쇠에 구워서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간장에 찍어 먹어도 고소하고 따뜻하고 아주 맛난 최고의 겨울 간식이 되어주었다.

 

며칠 지나 떡이 꾸덕꾸덕해지면 본격적으로 떡국에 넣을 떡을 써는 일이 시작됐다. 엄마와 언니들이 다 함께 둘러앉아 떡을 썰었다. 막내인 나는 주로 썰린 떡을 모아서 자루로 옮기는 일을 했다. 떡을 썰고 나면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들었지만, 온 가족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함께라면 그 시간조차 행복했다.

설날 떡국엔 만두가 빠질 수 없었다. 엄마는 "만두를 예쁘게 빚어야 예쁜 아기를 낳는단다"라며 우리 세 자매에게 만두 빚는 방법을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

 

큰언니는 완벽주의라 만두가 예쁘게 빚어질 때까지 조몰락거리다가 엄마의 꾸중을 듣고 했다. 작은언니는 뚝딱뚝딱 뭐든 척척해내는 스타일이라 스피드로 승부해서 엄마의 칭찬을 듣고 했다.  나는 두 언니와 5살, 8살 차이 나는 막내였기에, 늘 잔심부름 담당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예쁘게 만두를 만들어 보려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동골동골하게 찐빵처럼 만들어서 완성된 만두를 엄마에게 가져가면, "우리 아기 아주 예쁘게 만들었네"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래서 더 많이 만들어서 엄마의 칭찬을 많이 듣고 싶어 했다.

100개가 넘는 만두를 빚고 나면 우리 얼굴은 밀가루 범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만두 빚는 것은 잊고, 서로 밀가루를 뿌리고 얼굴에 문지르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다 엄마의 꾸중에 가까스로 멈추곤 했다.


설날이 되면 큰오빠 부부와 작은오빠, 셋째 오빠 모두 모였다. 할머니께 세배를 올리고 차례를 지낸 뒤에는 떡만둣국을 먹었다. 처음에는 예쁘게 빚은 만두가 그릇에 잘 담겨 나왔다. 그러나 몇 그릇 돌고 나면 만두는 대부분 터져있었다. 

터진 만두를 보며 모두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우리 중 누가  빚은 만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대식구에 손이 크신 분이라  떡과 만두를 많이 만들어 두셨다.  2주 넘게 먹다 보니 나중에는 지겨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질리도록 먹었던 엄마의 떡국과 만두가 한없이 그립다. 어쩌면 엄마가 12월에 하늘나라로 가셨기에, 12월만 되면 더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떡국에는 아련한 추억만 담긴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들은 "떡국 사건"은 여전히 우리 가족에게는 충격으로 남아있다. 나의 세 살 설날 때였다고 한다. 그날도 엄마는 떡국을 한솥 끓이고 만두를 따로 삶아 저녁 상 차릴 준비를 하셨다. 작은언니는 우는 나를 업어주며 이리저리 얼러주다가 떡국 상이 들어오자 '얼른 먹어야겠다'라며 나를 업은 채로 한달음에 달려가다가  중심을 잃고 그만 떡국 냄비에  엎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까. 다행히 나는 이마 정도만 까이고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작은언니는 뜨거운 떡국에 데어 팔에 화상을 입었다. 그때 언니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가위로 잘라내고 찬물로 씻는 등 온 가족이 큰 고역을 치렀다.

 

언니의 오른팔에는 지금도 그때의 화상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일로 작은언니는 국민학교 입학을 1년 미뤄야 했다. 그때 작은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니는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여름에도 짧은 옷을 잘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화상 자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얼마 전 작은언니의 환갑여행을 함께하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는데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거의 희미해졌어"

언니의 긍정적인 태도가 참 고맙다. 무엇이든 의연하게 넘기고 밝게 살아가는 언니 덕분에, 우리는 그 일조차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분주한 설날을 보내지 않는다. 그 시절의 설날 풍경은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쉰다. 떡을 썰고 만두를 빚으며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대청마루,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엄마의 정성과 사랑.

어린 시절,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이제 삼일 후면 2025년 새해가 밝아온다. 오늘 떡집에서 예쁘게 썰어놓은 떡국떡을 사며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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