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23살에 잠들다.
내게는 오빠가 세명 있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컸기에 함께 자란 기억은 많지 않다. 그중 셋째 오빠와는 9살 차이로 가장 친했고, 오빠가 나를 많이 예뻐했었다.
오빠는 키도 크고 멋졌다. 그리고 기타를 잘 쳤다. 오빠가 기타를 연주하며 부르던 팝송은 어린 나의 귀에 마법 같은 소리로 들렸다. 국민학교 다니던 내가 오빠 곁에 앉아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의 오빠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빠와의 추억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빠는 군대를 제대한 후 집에서 쉬면서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 대신 한식날 친척 할아버지의 묘 이장을 도우러 갔던 날이 오빠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오빠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길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2주를 버티다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우리 집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빠는 아들을 대신 보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셨고,
위에 천공이 생기기 직전까지 가셔서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아프셨다. 엄마는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대문 쪽만 바라보셨다. 마치 오빠가 그 문을 열고 돌아올 것처럼, 엄마의 눈길은 늘 대문에 닿아 있었다.
집은 조용했고, 어둡고, 적막했다. 너무도 조용해서 엄마의 가느다란 숨소리조차 들리는듯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불이 꺼져 있는 집안이 낯설고도 무서웠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말라가는 엄마와 아픈
아빠의 모습이 언니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오빠는 모두가 사랑했던 재밌고 인정 넘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한 달 용돈을 받아 어려운 친구들에게 밥을 사주는 바람에 생활비를 다 날려서 오빠와 함께 자취했던 큰언니는 아주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오빠의 이름은 그 일이 있은 후 집안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오빠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는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오빠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장례가 어떻게 치러졌는지조차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온 가족이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잊는다고 해서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고통을 꺼내지 못한 채, 침묵 속에 가라앉아 갔다. 아빠는 자신의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고, 엄마는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들의 슬픔은 집안 구석구석에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저 엄마를 돕기 위해 대청마루를 닦고,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엄마를 따라 절에 가서 오빠를 위해 부처님께 빌기도 했다. 그것이 엄마와 아빠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엄마아빠에게 웃음을 다시 되찾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엄마는 절에 다니며 조금씩 마음의 평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빠는 그러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에 의사 선생님이 와 있었다. 언니는 나중에 말했다.
“아빠 위 천공 가기 직전이라 조금만 늦었으면 생명도 위험할 뻔했대.”
나는 그날 이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노력했다. 부모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큰언니는 결혼 적령기를 한참 지나게 되었다. 큰언니가 오빠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했다. 오빠의 영혼이 꿈에 나타나 슬프게 보였다는 언니의 말에 가족 모두가 동의했다. 영혼결혼식 이후 큰언니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오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씩 더 따뜻하게 기억 속에서 살아났다.
제주도 한라산의 희디흰 상고대 사이에서 웃고 있는 오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23살, 꽃 같은 나이에 떠난
오빠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오빠 잘 지내죠? 이제 거기서 엄마, 아빠와 함께 있겠죠. 우리를 잘 지켜봐 주세요.
저는 이제 50대인데, 오빠는 여전히 20대네요. 그래도 오빠는 늘 제 오빠니까요.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그때도 기타를 치면서 노래 해 주세요. 그때 저는 오빠에게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오빠,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