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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뚝검 Sep 07. 2021

슬기로운 검사생활

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유령들(1) 


   쇠와 쇠가 부딪치는 충격음이 공장 안을 가득 메웠지만 다눈카(가명)는 아랑곳 않고 프레스기계에 연신 철근을 밀어넣었다. 일이 고되고 위험했지만 스리랑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받았던 월급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앞으로 5년만 이를 악다물고 참으면 스리랑카에 온가족이 옹기종기 지낼 수 있는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머나먼 이국의 삶을 버티게 해주었다.


    일을 마치고 회사 숙소로 돌아온 다눈카는 방 한 켠에 몸을 누였다. 주택을 개조해서 여러 개의 방으로 쪼갠 이곳은 비좁고 불편했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옆 마을 농장에서 일하는 태국 사람들은 제대로 된 욕실이나 화장실도 없는 농막에서 지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구중궁궐이었다. 


    괜찮아, 잘 버티고 있어. 다눈카는 스스로에게 주문 같은 격려를 하며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산 참외를 하나 깎아먹었다. 참외가 한국에서만 난다는데, 후숙을 시키면 메론 맛이 나기도 해서 고향땅 열대과일이 떠오를 때면 즐겨먹곤 했다. 과육이 말캉한 망고를 한 입 먹고 싶었지만 하나에 만 원씩이나 하는 망고를 쉽사리 사먹을 수 없었다. 고향에서는 길거리에 망고가 널려있었는데. 


다눈카! 쿵쿵! 다눈카! 쿵쿵!


    리산(가명)이었다. 리산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고향친구였다. "열쇠도 있으면서 직접 열고 들어오지, 왜 그래?" 다눈카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리산은 후욱후훅 숨을 가쁘게 내쉬고 덜덜 몸을 떨었다. 주먹 살갗이 벗겨져 그 위로 피가 방울방울 맺혀있었고, 옷에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리산!" 다눈카는 손에 휴지를 둘둘 감아 리산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옆 공장 락산 새끼 있잖아! 양아치 새끼! 술 마시고 있는데 괜히 시비를 거는거야. 그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 됐지, 뭐. 지금 그 녀석 패주고 오는 길이야.


    다눈카는 리산을 자기 방으로 들였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리산은 몸을 떨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리산에게 내어주고, 참외를 깎아 한 조각 건네주었다. 그제야 리산은 진정이 되는 듯 보였다. "이제 제발 싸우고 다니지마, 고향 버릇을 여기에서도 못 버리냐, 너는."


영화 '방가방가', 외국인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로 방가 역을 맡은 김인권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타랑가(가명)는 5년째 작은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일한 덕에 사장에게 예쁨을 받아 작업반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한국인 처자와 결혼해서 가정도 꾸렸고, 얼마 뒤면 가족이 늘어난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 아내와 한국어와 한국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노점을 할 때에는 빛도, 희망도 없던 인생이 이렇게까지 술술 풀릴 줄이야. 타랑가는 휘파람을 불며 작업속도를 올렸다. 납품기일을 맞추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타랑가……. 타랑가…… .


    "락산! 이게 무슨 일이야!" 락산의 눈두덩은 벌에 쏘인 듯 부풀어 있었고, 입술이 터졌는지 입가는 피에 젖어있었다. 벌써 입 주변에 피가 굳어 피딱지가 져있기까지 했다. "리산한테 맞았어. 알지? 그 옆 공장에 있는 내 동창." 락산은 리산에게 맞았다고 했다.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데 리산이 시비를 걸었고, 스리랑카에 두고 온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다며 락산을 모욕했다고 했다. 크게 싸움이 벌어졌는데 힘에서 밀리는 바람에 맞기만 했다고. 


    타랑가는 고향친구가 얻어터져 엉망이 된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똑같이 때려줘야 속이 후련할 것만 같았다. 당장 기계들을 멈추고, 직원인 두민다(가명)를 불렀다. 타랑가와 락산, 두민다는 타랑가의 중고승용차에 몸을 싣고 리산이 사는 숙소로 향했다.



쾅- 쾅- 쾅- 쾅-


    누군가 부술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눈카는 잠을 깼다.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커다란 남자 3명이 서있었다. 그 남자들은 스리랑카말로 외쳤다. "리산 이 새끼! 어딨어! 방이 어디야?" 잔뜩 흥분한 남자들은 다눈카를 밀어젖히고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하나씩 방문을 열어보며 리산을 찾자 각자의 방에 있던 사람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여깄다! 리산 새끼!



    타랑가는 리산을 찾았다. 얼굴에 상처 하나 없이 태연히 자고 있는 리산을 보니 간신히 참아왔던 화가 솟구쳤다. 내 친구는 얼굴이 저렇게 엉망이 됐는데 잠이나 자고 있다니. 타랑가와 두민다는 리산에게 달려들어 그 위에 올라탔다. 두 주먹을 번갈아가며 리산에게 휘둘렀다. 그때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타랑가의 뒤통수를 휘갈겼다. 순간 별이 번쩍였다. 뒤를 돌아보니 문을 열어준 남자가 프라이팬을 들고 서있었다. 체구도 작은 녀석이 겁도 없이 남의 싸움에 끼어들다니. 타랑가는 곧장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켁켁-.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다눈카는 덩치가 큰 남자에게 깔려 발버둥쳤다. 온힘을 다했지만, 사력을 다했지만 그 완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밀리고 밀려 자신의 방까지 밀렸다. 그 남자는 다눈카의 위에 올라 타 주먹을 휘둘렀다. 더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살고 싶었다. 


    다눈카는 지푸라기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손을 뻗었다. 턱- 무언가 손에 잡혔다. 참외를 깎고서는 바닥에 놓아둔 과도. 이거다. 다눈카는 과도를 손에 쥐고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칼끝으로 쑥 깊이 박히는 느낌이 났다. 이내 그 남자가 힘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다눈카는 힘이 빠진 남자를 밀어넘기고 숙소 밖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잡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타랑가! 타랑가!


    체구가 작은 남자가 도망치고 난 그곳에 타랑가는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안쪽 허벅다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락산은 옷을 가지고와 상처를 꾹 눌렀지만 쉽게 피가 멈추지 않았다. "두민다! 너 운전할 줄 알지!" 병원에 가자! 락산은 타랑가를 들처없고, 차에 태웠다. 어서 병원에 가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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