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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Feb 19. 2024

하츠코이, 홋카이도

오래된 약속 그리고 첫사랑


올 겨울, 엄마와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약속이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나는 엄마와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곳으로 둘이서 떠나자고 약속을 했었다.



고등학교 입시, 대학교 입시, 학업, 인턴… 뭐 그런 현실적인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계속 미뤄졌지만.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엄마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어도 배웠고. 가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꿈은 항상 엄마의 마음 속에 첫사랑의 추억처럼 남아있었다.



엄마가 그런 미련을 티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종종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엄마의 눈빛을 보았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오타루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눈이 소복하게 덮인 마을은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푸르도록 흰 것이, 그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러브레터의 주인공처럼 "오겡끼데스까?"라고 허공에 외쳐보았다.



이별과 작별의 차이를 아는가?



작별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고,



이별은 바라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을 뜻한다.



엄마와 나는 이별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상처받았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눈길을 걸어가며, 나는 문득 엄마에게 한번도 말을 꺼낸 적이 없던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사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 엄마한테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비밀로 해뒀던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말을 할걸 그랬다.



날이 저물 때까지 우리는 눈길을 걸었고,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히자 우리는 불빛 아래서 가장 낭만적인 왈츠를 췄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얼른 호텔 밖으로 나가 난간에 쌓인 눈을 쓸어보았다. 유키, 하나. 유키노 하나. 눈꽃은 이렇게나 아름답고 연약하다.



금세 눈물처럼 녹아버리지만 잊을 수 없는 찰나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게, 첫사랑과 닮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는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사요나라. 잘 지내야 해.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홋카이도에 함께 가자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풍경들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다는 뜻이니까.




하츠코이, 홋카이도



작가노트


한줄 요약: 엄마와 딸이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나며 첫사랑을 공통 분모로 서로에게 공감하고, 첫사랑을 잘 떠나 보내는 작별 여행 이야기


주인공: 딸(하나), 엄마(유키)


스토리라인: 졸업반에 올라가는 대학생인 하나는 첫사랑인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바쁘게 살아간다. 오랜만에 인턴이나 아르바이트가 없는 방학을 보내게 된 하나는 문득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곳으로 기차 여행을 가자는 엄마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하나는 오타루에서 엄마와 함께 걸으며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첫사랑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고 위로 받는다. 홋카이도 여행을 통해 하나는 그동안 바쁜 일과로 묻어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고, 비로소 첫사랑과 작별할 수 있게 된다.


심상: 눈꽃 - 작고 여리고 아름다운 눈꽃. 햇빛에 눈물처럼 녹아 사라져버리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평생 남을 첫사랑의 기억.


왜 일본일까? 일본은 그 사람이 정말 가보고 싶어했던 곳이다. 일본 중에서도 시리도록 아름다운 홋카이도에서 그 사람과 나의 시선을 포개어본다. 일본은 엄마에게 첫사랑처럼 남아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엄마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어도 공부했었고. 가족들의 반대로 좌절된 꿈이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엄마도 현실의 일과 속에 파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소녀 시절의 꿈을 제대로 마주해보면 좋겠다.


누군가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묻는다면: 이 영화는 자전적인 애도 영화다. 삶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이 다가오면 우리는 바쁜 일과 등으로 슬픔을 황급히 덮어버리려 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미뤄진 슬픔을 제대로 대면하고 애도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그 상처를 돌아볼 새도 없이 현실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 상실의 그림자에서 묵묵히 걸어나오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후기


홋카이도에 가기 전부터 여기 가면 단편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방학동안 시나리오 작성부터 플롯 구성, 영상 촬영 등을 공부했고. 오디오 간 여유가 충분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기록하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5분 30초짜리 단편을 만드는 것도 이렇게 품이 많이 드는데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에게 저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번역을 도와준 친구와, 여행과 촬영 작업을 함께해준 엄마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계기가 된 그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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