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작가의 말
나는 라디오를 듣는 세대는 아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찾아 듣지는 않았지만 라디오에서 조근조근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뭐랄까 유튜브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너무 쨍해서 듣다 보면 피곤하고, 오디오북이나 뉴스는 정보를 전달하는 목소리다보니 어느정도 인지적 부하가 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듣고 싶은 부분만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차분한 대화라서 좋다. 마치 반주처럼 잔잔하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그러다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면 금방 감겨들곤 한다.
이렇게 라디오와 나의 인생을 톺아보니 라디오와 관련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는 기숙형 고등학교에 다녔다. 매일 밤 점호와 소등을 할 때 사감 선생님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타고 기숙사에 조용히 메아리쳤다. 사감 선생님은 나의 멘토 선생님이셨는데, 나를 포함한 멘티들의 생일이면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취침 방송 끝에 덧붙이곤 했다. 하루 종일 생일 축하를 받아도 자정에 넘어갈무렵 방송으로 나오는 사감 선생님의 생일 축하만큼 나를 신나게 하는 것도 없었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대학교 1, 2학년 때 비대면으로 근근이 교내 방송국 활동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도 라디오 진행이다. 시험이나 진로 관련 고민, 연애 사연 같은 것들을 받아서 읽어주고, 아나운서부 친구들과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찍은 이 슴슴한 컨텐츠가 좋았다.
라디오와 가늘고 긴 인연을 이어온 내가 이번 전시를 계기로 KBS포항 라디오에 나오게 되었다. 사실 전시회만 해도 새롭고 귀중한 기회였는데 전시회를 하다보니 지역 신문에서 취재도 오고, 지역의 여러 중진 작가 분들도 만나는 뜻밖의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그 정점이 이번 라디오 취재가 아니었나 싶다. 전시를 기획하며 지금껏 찍어온 사진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면, 라디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는 사진이 내게 어떤 것인지, 나는 무엇을 찍고 싶은지와 같이 정체성에 관해 질문해볼 수 있었다.
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OOO에 다니면서 필름 사진을 찍는 pomme입니다.
2. 오늘 전시는 어떤 전시인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여행자입니다. 사실 ‘여행자’라는 주제의 전시를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은 건 아니에요. 평소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다닐 때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고, 처음에는 풍경 사진들만 찍었는데 점차 나만 기록할 수 있는 여행지에서의 찰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런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 모여 ‘여행자’라는 주제로 풀어낼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 거죠.
3. 몇 작품 전시하셨는지 알려주세요. 작품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전시 작품 중 가장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 혹은 소개하고 싶은 작품 소개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총 열 점의 작품을 전시하는데요, 이 중 두 작품을 소개드리고 싶네요. 첫 번째는 손님에게 오이 꼬치를 건네주는 할머니 사진이에요. 그 가게는 딱 봐도 역사가 오래된 가게같아 보였는데, 할머니와 딸이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웃어주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친절로 손님을 맞아온 할머니의 시간이 곱게 쌓인 모습을, 그리고 손님이 그 웃음을 마주하며 미소로 응답하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두 번째는 산타모니카 비치에서 찍은 석양 사진이에요. 저는 여행을 가서 길을 잃었을 때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보면 뜻밖의 풍경을 보고 감탄하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죠. 이 사진의 경우 필름이 카메라 렌즈에 긁히거나 빛이 새어들어온 것 같은데, 의도치는 않았지만 새어들어온 빛 덕분에 환상적인 일몰의 이미지가 형성됐어요. 그것도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겠네요.
4. <작가님 이야기> 언제 사진을 처음 시작하시게 되셨는지, 왜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요.
계기는 별 거 없어요. 제가 필름 카메라 외에도 전체적으로 오래된 것들을 좋아해요. 시간의 때가 묻은 것들 말이에요. 아무튼 동생이 입시할 때 자소서를 조금 도와줬고, 나중에 아빠가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봤을 때 왜인지 모르겠는데 필름 카메라를 사 달라고 했어요. 그것도 <롤라이 35SE>라는 정말 구체적인 모델을요. 그때는 이렇게까지 진심이 될 줄 몰랐는데 어느순간 누군가 저를 찍은 사진 속의 저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더라고요.
5. <작가님 이야기> 작품을 그리면서.. 힘들었을 때가 있으셨나요? 즐거울 때나 보람될 때는 언제인가요?
힘들 때라고 하면... 제가 쓰는 카메라는 목측식에다가 노출계도 수동이고 줌인 줌아웃도 안 돼요. 그런데 포착하고 싶은 순간은 찰나죠. 그 순간에 정신이 팔려서 이런 세팅들을 제대로 맞춰놓지 않은 채로 일단 셔터를 누르고, 나중에 사진을 현상하고 나서야 초점이 나가거나 노출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속상해요.
그럼에도 사진을 찍는 게 좋은 이유는 필름 사진을 시작한 이후로 아름다움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어떤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주변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다 보니 일상을 살아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6. 나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세요.
제게 사진은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는 순간 과거의 기억과 감각이 피어오르는 부분이 있죠. 홍차와 마들렌보다는 훨씬 직접적이기는 하지만, 저는 제가 강렬한 감정을 느낀 순간들을 포착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감각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그 순간을 재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관람객들에 대해서는, 사진이 주는 감흥이 개인의 어떤 에피소드를 일깨우고 순식간에 다시 살아나게 하는 두드림이 될 수 있다면 보람 있을 것 같네요.
7.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작품활동을 하고 싶으신가요?
잠정적으로는 지금껏 해온대로 좋아하는 만큼 찍고 싶습니다.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말문을 트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관객의 현재와 과거, 미래에 말을 걸고 싶네요.
8. 이후에 계획되어 있는 전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아직 구체적인 전시 계획은 없지만 올해가 제가 대학을 졸업하는 해인만큼 젊음 내지 청춘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습니다. 일과가 끝난 후 어두운 조명 아래서 춤추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격정적인 에너지, 정해지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함, 설렘, 불안함, 서툴게 시작하고 미숙하게 끝난 것들... 뭐 그런 우리 시대에서 젊음의 단편을 보여주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싶습니다.
9. 덧붙이고 싶으신 말씀 (청취자 여러분에게, 관람객에게.. 등 )
생각지도 못한 전시를 하게 됐습니다. 우선 좋은 기회를 주신 갤러리 포항에 감사드리고 보러 와주신 관람객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0. <사람과 세상>
주제는 자유, 30초~60초 사이, 음성편지 남겨주실 수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주제는 친구, 부모님, 사랑하는 사람, 반려동물, 10년 후 나에게? 등 자유주제..)
** (시작멘트)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______ 에게 음성편지를 남기려고 합니다. (로 시작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아빠에게 음성편지를 남기려고 합니다. 제가 사진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 중에는 늘 우리를 찍어주고, 아름다운 풍경을 찍어서 보여주는 모습이 많았으니까요. 옛날에는 사진에 찍히는 게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많이 도망다녔는데, 사진을 시작하고 나니 아빠가 우리를 얼마나 애정어린 눈빛으로 봤을지 조금 상상이 되네요. 이제는 제가 아빠를 많이 담아드릴게요. 사랑해요!!!
마지막은 헬렌 작가님이 만들어주신 인터뷰 영상. 비디오 아트를 하시는 분이라 그런가 사진 몇 컷을 찍는 줄 알았는데 이런 작품을 만들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