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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Feb 08. 2024

사진전 합니다

여행자의 시선에서

파리 출국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필름 사진을 현상하러 동네 사진관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탁자에 앉은 할아버지가 말을 거셨다. 사진관 주인은 아닌 것 같고 주인 분의 친구이신 것 같은데 예술인 특유의 분위기가 단번에 느껴졌다. 원래 자기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닌데 젊은 사람이 단정하게 입고 필름 사진을 현상하러 와서 눈길이 갔다고. 그렇게 대화를 시작되었다. 그 분은 포항에 갤러리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신 사진 작가님이셨는데 사진에 대한 철학이 있으신 분이었다. 단순히 예쁜 풍경을 보기 좋은 구도로 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좇는 데 목말랐던 나에게 오아시스같은 만남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 대화하고 끝날 인연인 줄 알았으나 명함과 인스타그램도 교환하게 되었고, 작가님은 <사진 기호학>, <밝은 방>과 같이 사진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책들도 몇 권 추천해주셨다. 그러고는 수많은 디지털 파일 속에서 raw file 같은 학생을 만나 기쁘다는 과분한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종강을 할 무렵, 작가님이 갤러리에서 내부 추천을 통해 신진 작가를 선발해서 신진 작가전을 여는데 포트폴리오를 제출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다. 공대생이라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작가님이 최대한 포괄적으로 달라는 말만 듣고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을 무작정 보내드렸고, 감사하게도 심의가 통과되어 갤러리에서 모든 전시 준비를 지원해주는 공짜 전시의 기회를 갖게 됐다. 


이번 방학에는 오랜만에 온전한 휴식을 취하며 영혼을 채우는 시간을 보냈는데, 전시의 기회도 주어지면서 지금까지 내가 사진을 통해 무엇을 담아내고 싶었는지, 내 시선이 항상 향했던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읽어보려 노력했다 - 작가님은 내 사진에서 성숙되지 않은 대상들과의 소통이 신선하다고 하셨다. 사진전의 주제가 <여행자>로 정해진만큼 여행자로서의 태도는 어땠는지, 지난했던 여정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지도 회고하며 작가노트도 차분히 써내려가 보았다. 




[여행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여행은 내게 기본적으로 큰 길에서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나는 항상 자유를 갈망해왔다. 누군가가 나를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익숙함과 시선이 종종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나를 옥죄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 것들을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샛길로 들어서는 모든 행위는 여행이다. 예를 들어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것에 눈길을 주고, 주변의 소음에서 벗어나 그 대상에게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여행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여행이 주는 새로움의 본질이며 그 대상은 풍경, 사람, 사물 등으로 무궁무진하다. 


[사람이 있는 풍경]

사람은 소음이 되기도 하지만 사진의 화룡점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진에 강력한 내러티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주로 정적인 풍경과 달리 사람들은 동적이다. 그래서 나는 내 눈길을 끌었던 바로 그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린다. 


[여행과 사람]

여행을 가면 나는 항상 그 지역의 사람들과 교류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도시의 정체성은 결국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지 않고 관광지만 바쁘게 돌아다닌다면 나는 (아마도 이방인에 의해서 형성되었을) ‘이미지’에 열광하는 관광객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여행지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자연]

옛날에는 화려한 도시가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도 자연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자연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면서도 온전한 안정감을 준다. 대자연 속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대지, 바다와의 연결감을 느낀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를 내려 놓는다. 얽히고 섥힌 나무 뿌리, 붉은 대지와 푸른 바다 사이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때로는 물고기를 따라 몇 시간씩 헤엄치며,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숲 속을 걸으며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발견한다. 


[Serendipity]

길을 잃었을 때,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는 것 뿐이니. 예정에 없던 여행 속에서 나는 마치 꼭 만나야만 했던 – 그러나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해 놓칠 뻔한 – 것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곤 한다. 이런 우연의 순간마다 나는 작은 탄성을 내지른다. 이것이 serendipity다. 때로는 이런 뜻밖의 만남을 위해 홀로 나선다. 종이 지도를 들고, 표지판을 보면서 혹은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오늘의 길을 그린다. 여행에서는 유독 세상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가, 여행은 더욱 현실과 멀게 느껴진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에는 현대 사회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이들의 호의도 있으리라. 


[필름 사진의 매력]

나는 여행지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곤 한다. 엽서는 서너 주가 지나서야 도착한다. 엽서가 도착했는지 직접 확인할 길은 없다. 엽서를 받은 사람이 보내온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다. 보통 엽서가 도착했을 무렵 나는 여행지를 이미 떠난 상태지만, 엽서를 받았다는 소식은 나를 여행지로 다시 데려가곤 한다. 필름 사진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엽서다. 당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원히 멈추고 싶은 순간들을 포착해서 셔터를 누른다. 여행 내내 이번에는 어떤 사진이 나왔을까, 설레고 기대가 된다. 그렇지만 여행이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필름을 현상하러 달려가는 건 아니다. 열어보지 않은 선물 상자를 보듯이 현상되지 않은 필름을 힐끗거리다가 우연한 계기로 혹은 여유가 생겼을 때 천천히 현상소로 향한다.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메일을 받기까지 가장 두근거리는 몇 시간을 보낸다.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온 엽서, 여행지에서의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보내는 선물. 그래서인가, 필름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기념품을 사는 데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다니는 모든 곳마다 스마트폰을 들이밀지도 않는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는 데 집중하다가, 필름 카메라를 들고 시선이 닿은 곳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래서인가,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나를 찍은 사진 속의 나는 항상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더라.




호기심어린 발길이 닿은 곳, 여행자의 애정어린 시선이 머문 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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