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날밤까지 말 것
VC 투자팀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VC는 10년 후 커리어골로 생각하고 있는 곳인데 경영학회를 하며 컨설팅펌에서 새로운 산업을 빠르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훈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컨설팅펌 인턴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굳을대로 굳은 머리로 혼자 케이스를 풀다가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컨설팅펌이 VC라는 커리어골에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기 전에 VC에서 먼저 일해보고 뭐가 필요한지 알아야하는 거 아닌가?
카페에 인턴 공고라도 올라오는 컨설팅과 달리 VC는 인턴 공고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동문 네트워킹 행사에서 뵌 선배님께 간단히 설명을 드린 후 이력서를 전달해드리며 주변에 인턴을 뽑고 있는 하우스가 있으면 이력서를 전달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마침 선배님이 계신 하우스에서 투자팀 인턴을 뽑고 있어서 추천 채용으로 면접을 보게 됐고, 추천 채용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드려 맞은 면접을 보고 입사하게 됐다. (면접 끝나고 선배님께 전화가 왔는데 면접에서 물음표 살인마 마냥 질문 공세를 하시던 심사역 분들이 면접이 끝나고는 꽤 좋아하시면서 괜찮은 애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렇지만 충격과 공포 속에서 면접을 본 나는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셨는지 의문이다.)
딱딱한 여의도의 증권사, 사모펀드와 달리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이 회사는 조금 더 말랑말랑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처음으로 진정한 진로 탐색이란 걸 시작한 나는 머리가 복잡하고 각이 잡혀있는 상태였지만. 바쁜 업계답게 면접 3일 후 출근, 오전에는 온보딩을 하고 오후에는 실무에 투입됐다. 이번에는 조직과 새로운 사람들에 빨리 적응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업무에 빨리 적응해서 더 많은 기회를 잡고 더 나은 엑싯 옵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빠른 사이클이 오히려 좋았다.
그런데 바쁜 걸 도와주는 RA 특성 상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업무를 받았다. 다음날 LP사에 C레벨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발표자료 완성이 되지 않아 바로 장표 제작에 투입되어 버린거다. 팀원들과의 첫 점심식사에서 "PPT 잘 만들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얼어버렸다. 왜냐하면 디자인 센스는 영 없는 내게 장표를 "빨리", "잘" 만드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면접에서는 어떻게든 뽑혀야 하니까 (시간과 노력을 갈아서 만든) 경영학회 장표를 보여드리며 "이정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당장 내일 C레벨 세미나에서 쓰일 장표를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취업 사기범이 될 뻔 했지만 일단 열심히 하겠다고는 했다. 자, 그러면 나는 PPT 디자인도 잘 못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사람인데 새로운 조직에 온 첫날에 중요한 장표를 만들게 됐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뭘까? 혼자 끙끙 앓다 이상한 거 들고 와서 사수님 당황시키지 말고 자주 자주 확인받아서 삽질을 하지 않는 거다. 근데 사수님도 장표를 만든다고 바쁠건데, 아무 질문이나 막하면 모자란 인턴이 되지 않을까? 장표도 결국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와 톤앤매너를 파악하는 게 핵심일 거다.
그래서 작업할 페이지를 받고 핵심 메시지와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잘 이해했는지 확인받고, 레퍼런스를 요청했다. 핵심 메시지도 잘 이해했고, 요구 사항도 그게 맞다고 하시고, 레퍼런스도 받았다면 장표를 어떻게 구성할지 레이아웃을 만든다. 이런 데 이런 내용을 넣고, 레퍼런스 참고해서 이런 내용을 강조할건데 괜찮냐, 이걸 확인 받고 나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삽질의 가능성을 많이 쳐낼 수 있다. 그 다음에 집중해서 초안을 만들고, 보내기 전에 레퍼런스와 비교해보며 보여줄만한 수준인지 셀프 체크를 한 다음에 사수님께 보내드린다. 이때 상식적인 수준의 시간 내에 보내드리고, 내가 부족함이나 어려움을 느낀 부분이나 발전시키고 싶은 부분을 덧붙이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정신없는 중에 나름 중심을 잘 잡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며 내가 어떤 특성을 가진 곳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봤다. 일단 나는 도파민 중독자이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면 안된다. 계속 호기심이 생기는 일이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며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좋은 결과를 내면서 개인적인 성장도 이룬다는 걸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능력자들이 한명 한명 코어 플레이어로 일할 수 있는 작은 조직에서 일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그런 조직은 꽤나 흔치 않고, 그들의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능력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의 challenge가 기대된다. 더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