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처리가 제일 어렵네
VC에서 인턴을 하면 스타트업 피칭하는 거 보고, 데모데이, 컨퍼런스같은 굵직한 행사에 참여하고 그럴 것 같지만 서류 처리, 리서치, 기타 잡무를 아마 제일 많이 하게 될 거다. 이건 심사역님들이 면접에서도 말씀하셨던 거고, 나 또한 겨우 인턴이 처음부터 뭔가를 판단하는 일에 투입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패기롭게(자의식 과잉 아니었을까) 새로운 조직에 인턴으로 들어가 엄청난 걸 해보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인턴을 하며 느끼는 괴리에 허우적거렸지만 이제는 시키는 일부터 잘해야 더 도전적인 것을 해볼 기회와 시간이 생긴다는 말을 이해하게 됐다. (이런 게 고등학생 때 듣던 수학 인강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주제 파악"이 아닐까? 아무튼 그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신, 수능을 넘어 인생에도 도움이 된다...)
둘째 날에 본격적으로 인턴 업무를 시작하며 서류 처리 인수 인계를 받았다. 투자가 됐든, 파트너십이 됐든, 하물며 집 구하기가 됐든, 낯선 사람과의 약속은 "서류"가 신뢰를 보증한다. 그 말은 투자가 일인 VC에서는 서류가 엄청나게 발생한다는 뜻이다. 투자한 회사의 임원이 바뀌는 것에 대한 동의서, 지분이 바뀌는 의사결정에 대한 동의서, 공동 투자하는 파트너에게 보내는 서류 등 하나하나의 중요성도 크다. 심사역님들이 의사결정을 하면 인쇄하고 도장찍고 우편을 보내는 것은 인턴의 역할인데, 특별히 생각을 할 필요는 없는 반복 업무인데 서로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르고, 실수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보니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리 꼼꼼한 사람이 못 되지만, 이건 꼼꼼하면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는 업무니까 빠뜨리는 것 없이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세팅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체크리스트도 만들고, 초반인만큼 우편 발송을 하기 전에 심사역님들께 스캔본을 회신하여 확인을 받았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실수는 한번 혼나고 고치면 되는거지만 B사에 보낼 서류를 A사에 보낸다거나, C 펀드 도장을 찍어야하는데 D 펀드 도장을 찍어서 보내는 식으로 외부에 보내는 서류에 실수를 하면 진짜 큰일나는거니까. (혹여나 실수한 걸 발견했으면 절대 숨길 생각하면 안된다. 불이 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고, 내 입이 아닌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실수한 게 밝혀지면 일이 커졌다는 뜻이므로...)
실제로 내가 처음으로 처리한 동의서는 공란이 모두 채워지지 않았고, 우편 발송 전에 심사역 님께 스캔본을 회신하며 잘못된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며 인감증명서를 요구하지는 않는지, 채워야할 칸은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한다는 레슨을 얻었고 웬만하면 도장을 사용해서 형식을 갖추는 것이 좋고, 굳이 필요없는 부분은 인쇄할 필요가 없다는 팀도 얻었다. 실수는 웬만하면 안하는 게 좋지만 만약 했다면 감정 상하고 자존감 낮아지고 할 필요 없이 내가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건강한 발전이 있는 것 같다.
오전에는 메일함으로 날아온 서류들을 처리하고 늦은 오후에는 요청받은 산업 리서치를 수행했다. 리서치는 정말 간단하게 끝날 수도,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수 있는 작업이므로 요구 사항을 명확히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이 산업 저 산업을 다 뒤져봐야 하는 이 업계에서는. 그래서 리서치 결과를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 깊이가 필요한지, 단순 구글링으로 해결하면 되는지 어느정도 공신력이 필요한지 여쭤보고 각을 본다음에 리서치 계획을 세우고 검색을 시작해야한다. 냅다 구글창부터 띄우고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요구 사항을 확인한 다음에는 내가 답을 찾아야할 key question들을 나열하고, 어디에서 무슨 키워드로 검색해야 이런 자료들이 나올지를 생각해본다. 단순히 찾아봐서 잘 안나오는 경우도 많으므로 어떤 주제에 대해 리서치를 종료하는 손절의 기준시간도 정해야한다. 리서치가 끝나면 전달받는 사람이 원하는 답을 찾기 편한 형식으로 정리하고, 파일을 보내주며 내가 무슨 기준으로 리서치를 했는지, 안 나온 게 있다면 어떤 시도를 얼마나 해봤는데 잘 안나오더라 하는 설명을 덧붙여주면 좋다.
아무튼 VC에서 RA로 일하며 하게 될 가장 베이직한 3대 업무(리서치, 장표 작성, 서류 처리)를 이틀만에 모두 경험해본 것 같은데,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서로 더 편하고 빠르게 일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면서도 미래에 대한 고민도 놓지 말고... 고3이 제일 힘든 시기(이고 지나면 인생이 꽃길일거다)라는 건 white lie가 맞다는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