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진로 고민의 늪
VC에는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지금의 그들을 만든 경험이 없었다면 갖기 어려웠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질문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사업을 해보지도, 깊게 공부를 해보지도 않은 이십대 초중반이 무엇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사업을 판단까지 할 수 있을까.
저녁 시간대까지 요청받은 리서치 업무를 하다가 수석 심사역님(이하 H)과 저녁 식사를 했다. 면접 때도 약간 즉흥적이면서 날카로운 분이라고 느꼈는데 일대일로 대화를 해보니 정말 솔직하고 자신만의 투자 철학이 있으신 분이었다. H는 내게 사업이 뭐냐고 물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면서도 평소에는 잘 생각해보지 않는 질문을 받면 굳어버리곤 한다.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사업은 돈 버는 것이라 생각해서 사업은 돈 버는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투자자라면 돈 잘 버는 사람한테 투자하고 싶을건데, 어떤 사람이 돈 잘버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2차 당황했다. 나는 자신의 강점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잘 연결시키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H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H에게 사업은 의사결정의 연속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결정을 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의사결정을 확률적으로 잘 해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심사역이 왜 되고 싶냐고 묻길래 "세상에 좋은 변화를 만들고 싶은데, 연구를 하든 기업에 들어가든 조직 하나하나를 발전시키는 건 느리거나 임팩트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업들 여러 개를 한번에 발전시킬 수 있는 벤처 캐피탈에 가고싶다"라고 대답하며 직전학기에 교내 창업팀을 발굴하며 느꼈던 갈증 - 대표님들을 만나며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드리고 싶은데 아는 게 없어서 답답했다 - 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H는 세 가지 재밌는 것을 말해줬다.
기업이 안 망하고 잘 크려면 자기 객관화, 주변 사람들을 메타인지 시키는 것, 그리고 해결이 필요한데 앞에 두 개는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해결이 될지 말지는 랜덤이기 때문에 심사역은 조언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였다. 어느정도는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개선은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에 동의하고, 동료들에게 문제 의식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그 기업이 잘 굴러갈 리가 없으니까. 그러면서 또 재밌는 논의들이 이어졌던 것 같은데, 창업해서 매각까지 해보고 이런저런 기업을 다 만나본 H가 던지는 질문들에 혼이 쏙 빠졌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다만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예리한 질문을 던질 때 으레 받는 충격 - 내가 보아온 세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다는 걸 인식하며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의 파장만 남아있을 뿐.
다음날에는 인턴에서 전환이 되셨던 주니어 심사역 S와 점심 식사를 했다. 업무도 딱 부러지게 잘하시고 질문도 잘 받아주시는 분이라 배울 점도 많고 고마운 분이셨는데, 식사를 기회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보통 심사역이라는 직업은 이런저런 경험 끝에 가지게 된다. S를 제외한 다른 심사역님들도 창업, 대학원, 대기업 등 심사역 이전에 다양한 경험을 해왔고, 그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갖기 어려웠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질문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사업을 해보지도, 깊게 공부를 해보지도 않은 이십대 초중반이 무엇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사업을 판단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과 함께 당장 3년동안의 커리어 옵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말씀드리니 S는 감사하게도 본인의 솔직한 경험과 고민을 나눠주셨다.
판단에 대한 결과가 몇 년 후에야 드러난다는 것도, 그때 가서 몇 년 전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참 두려운 일이다. 비슷한 또래의 주니어 심사역들이 없다는 것도, 그래서 고민을 나누고 함께 발전 방향을 모색할 친구가 없다는 것도 참 외로운 일이다. 인턴에서 정규직이 된 순간 독립적인 심사역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방치되고, 더이상 "인턴이니까”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없어 질문도 제안도 머뭇거리게 될 수 있는데 나는 가이드 없는 환경에서 억세게 자라날 수 있을까?
주니어 심사역이라는 출발에 대해 H는 어차피 심사역 하고 싶으면 VC업계에서 주니어로 시작해서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정 어려우면 2-3년 하다 현업 다녀와서 레쥬메를 내미는 게 진입하기 훨씬 쉬울거라고 말하며 주니어 심사역의 밝은 면을 보여줬고, S는 본인이 경험하는 것과 고민들을 솔직하게 말해주며 주니어 심사역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말해줬다. 당장 3년동안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고, 해보고 싶은 건 많고, VC업계가 들어오기 쉽지 않다는 점이 고민을 더 깊어지게 한다. 일단 내일을 잘 살아보기로 하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계속 답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든다.
*사람에 따라 리스크를 체감하는 정도도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다. 창업자 출신인 H는 심사역을 하면 내가 굳이 창업하지 않아도 되는 몇십 개의 회사에 투자하고 그 중에 몇 개 잘되면 된다는 점에서 많이 부담을 느낄 게 없다고 했는데,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온 내게 투자의 결과를 오롯이 책임진다는 건 겁이 나는 일이다.